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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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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끄트머리 사무실 2014. 10. 7.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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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

대한민국의 뮤지션.


짧은 시간에 큰 문화적 충격을 가져온 한 시대의 혁명의 주인공.
1990년대 한국대중문화의 아이콘.


한국의 대중음악을 논할 때, 조용필과 더불어 절대로 빠지지 않는 가수이다. 문화대통령이라는 수식어를 소유하고 있으며, 대중음악 뿐만 아니라 1990년대 한국 사회를 대표하는 시대적 아이콘. 2014년 현재까지도 고정팬을 거느리고 있다. 팬들 사이에서의 별명은 대장.

가수 신해철과는 친척 사이이다.



본명정현철(鄭鉉哲)
출생1972년 2월 21일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신체173cm, 55kg, O형
소속서태지컴퍼니
학력서울북공업고등학교[1] 중퇴
가족1남 1녀 중 둘째
배우자 이은성 (2013 ~ )
데뷔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 1집
'난 알아요'
공식홈페이지 페이스북 
유튜브 채널 서태지 아카이브

목차

1. 음반
2. '서태지'라는 이름의 유래
3. 성장과정
4. 뮤지션 활동
5. 최근의 행적
6. 인간관계
7. 한국 음악사에 남긴 의의
8. 패션 문화 선도
9. 서태지 팬덤과 안티
10. 그외

2. '서태지'라는 이름의 유래 

서태지의 이름에 대해서도 유난히 말이 많은 편인데, 전 매니저 최진열의 증언으로는 서태후에서 따왔다는 설도 있고 공연장이라는 뜻의 영어 'STAGE' 를 줄여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그 중에서 일본의 락밴드 엑스 재팬의 베이시스트였던 'taiji(타이지)' 에서 따왔다는 설이 많이 퍼져있다. 지금껏 그 유래에 대해 명확하게 알려진 것은 없었으나 '2009년' 8집 활동 당시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나와 자신이 좋아하는 한자인 '태' 자와 '지' 자로 이름을 짓고 그중에 가장 어울리는 성씨인 '서' 씨를 합해 '서태지' 로 지었다고 스스로 밝힌 바 있다.


여담이지만, 1980년대 인기 드라마 수사반장 중 한 에피소드에 '서태지'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연기한 사람은 박영규이며, 겁탈을 당한 부인의 원수를 갚는 내용이다. 이곳에서 다시 볼 수 있다.
http://cue.imbc.com/MediaListSearch.aspx?query=수사반장&sort=sim&startNum=16

3. 성장과정 


1집 활동 당시 출연한 인간시대. 그의 성장과정과 데뷔 당시 일상, 활동 모습이 담겨있다.
8세꼬마태지자고있음.jpg

파일명은 신경쓰지 말자
어린시절 사진들은 눈이작고 어쩐지 지금과 다른 모습이라 최수종쇼에서 본인이 스스로 성형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가회동에서 어머니 강명숙과 아버지 정상규 슬하의 누나 정혜원과 함께 1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나 이후 청와대 근처의 청운동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2] 어린 시절부터 RC카나 인형을 좋아했는데 문구점에서 상습적으로 인형을 40개나 훔쳤다가 너무 대놓고 훔치는 서태지의 모습을 어이없이 지켜보던 문구점 주인이 참다못해 서태지의 어머니께 꼰질렀고 어머니께 엄청 혼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는 서태지의 울트라맨이야 뮤직비디오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와있다.

재동 초등학교때 음악보다는 과학을 좋아했고 발명대회나 과학경시대회에서 상도 받을 정도여서 주변에서 발명가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본인 말로 초등학교때는 공부 잘했는데 중학교 시절부터 음악에 빠지면서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가 대동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부터 음악에 빠지게 된것은 음악 그자체가 아니라 길을 가다 악기점에서 일렉트릭 기타를 우연히 보게된 것이 계기로 최초의 음악활동은 중학교 2학년때 친구와 함께 결성했던 '하늘벽'이라는 5인조 스쿨 밴드를 결성하면서부터였다. 리드 기타를 맡은 안준범이라는 친구가 리더였는데, 본인이 리더가 아니었지만 작사, 작곡, 편곡, 베이스, 보컬까지 모두 자신이 맡은 것으로 보아 팀내 비중은 역시 서태지와 아이들 때처럼 본인이 제일 컸던 것 같다. 단순히 길을 지나다가 악기점에서 우연히 일렉기타를 본 뒤 일렉기타를 들고 폼재고 싶어서, 또 그룹사운드란 말이 왠지 있어보여서 친구들을 꼬드겨 결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성 당시 제대로 된 악기를 가진 멤버는 신문배달을 해 악기를 산 본인 뿐이라 나머지 멤버는 처음에는 집에 있던 의자, 통기타, 선풍기 창살, 피아노를 악기로 사용했다고 한다. 연주경력도 리더가 친형한테 기타를 배운 것과 건반을 맡은 친구가 피아노학원을 다닌 것이 유일한 연주 경력이었다.
서태지가 베이스 연주자로써의 시작이 되는 하늘벽의 베이시스트가 된 계기도 단지 베이스 기타가 뭔지도 모르던 그 시절에 통기타로 음을 짚어내는 것을 무척 좋아했는데 "음을 짚어내는 것이 베이스 연주자"라는 친구의 말에 베이스 연주자를 맡게 되었다고 한다.

나중에 서태지 15주년 기념관에 공개되어 나온 사진을 보면 이후에 알바든 뭘했든 사진에 제대로된 악기를 들고 있는걸로 보아 활동 후반에는 돈을 마련해 제대로된 장비를 구한 것을 보이며, 하늘벽의 녹음한 테이프에 들국화의 음악이 실려있던 것으로 봐서 들국화 카피 밴드였던것 같다. 서태지는 당시 국내 밴드로 들국화를 좋아한다고 했으며 어린시절 전인권이 우상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당시 인기 있던 머틀리 크루신데렐라본 조비 같은 메탈 밴드를 좋아했다고 한다.


서태지 생애 첫 밴드 하늘벽 멤버들과 찍은 사진

하늘벽로고.jpg

컴퓨터로 하늘벽의 로고를 만들었다.

중2때 음악에 심취하면서부터 학교 교사들의 체벌과[3] 음악하는 것을 삐딱하게 생각하는 학교내 시선때문에 점점 학교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고 학업과 학교생활에서 점점 멀어져간다.

서울북공고 진학후 스쿨 밴드 하늘벽은 해체됐고, 이때부터 음악이 자신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음악을 전문적으로 해보고 싶다고 결심하게 된다. 중학교 시절보다 늘어난 학업량 때문에 도저히 학교를 다니면서 음악을 할수 없다고 생각한 서태지는 학교를 자퇴하기로 하고 2개월의 기나긴 기간 동안의 설득 끝에 부모님 허락하에 학교를 자퇴하고 본격적으로 뮤지션의 길에 접어들게 된다.

재동초등학교, 대동중학교, 서울북공고 중퇴. 즉 그의 최종학력은 중졸이다. 왕년에 서태지가 고교 자퇴 당시 제출했다는 자퇴서가 인터넷에서 널리 회자된 적이 있다. 과연 명문이긴 하지만 실제로 제출된(그것도 1989년에) 자퇴서라기에는 내용이 좀 수상쩍어서 팬들 사이에서도 진짜 자퇴서라기보다는 일기장에 쓴게 아니겠냐는 말이 많았는데, 본인이 직접 자신이 작성한 것이 아니라고 언급했다.

음악과 관계 없는 개인신상 루머에 대해서는 해명할 필요를 못느낀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사실 서태지에 관련된 루머는 아래 언급되는 임신설과 같이 루머의 양이 너무 많은 관계로, 일일히 대응하자면 끝이 없기 때문에, 큰 건이든 작은 건이든 루머에 대해서는 무대응으로 일관하는 듯 하다.

내용이 궁금한 사람은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4. 뮤지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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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코리아? 안경을 벗으면 눈매가 날카롭다는 걸 알게 하는 사진

시나위 멤버로 활동하던 시절 야성미 넘치는 모습.
왼쪽부터 서태지, 리더 신대철, 보컬 김종서, 드러머 오경환.

17세에 학교를 자퇴하고 활화산이라는 밴드에 잠깐 머물렀지만, 멤버의 군입대로 해체되어 버렸다. 이후 기타리스트 이중산의 소개로 락의 대부 신중현이 운영하던 우드스탁이라는 클럽에서 연주하게 되었고 ,우연히 이 모습을 본 신대철의 눈에 띄고 신대철에게 픽업되어 시나위 4집의 베이시스트로 참여하게 된다.

당시의 상황에 대한 시나위의 리더 신대철의 회상은 이렇다.“한 아이가 매일 우드스탁으로 와선 몇 시간씩 제가 기타 치는 모습을 보곤 했죠. 처음엔 의식하지 않았죠. 내심 눈에 띌 만큼 머리가 긴 소년이 뚫어져라 공연에 몰두하는 걸 보고 헤비메틀 지망생이거나 팬이려니 했어요. 그렇게 한 달 정도 계속되고 말수가 적은 저로서도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때 말을 걸어보자는 심산으로 기타를 칠 줄 아느냐고 물었죠. 의외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기타를 잡았어요. 거침없이 연주하는 모습은 요즘말로‘장난’이 아니었죠. 그 자리에서 바로 ‘시나위’에서 활동을 해보자고 제의했고 그는 무척 기뻐했어요.

그러나 활동기간 동안 신대철김종서, 서태지 세 명의 음악적 견해차이[4]로 서서히 멤버간에 팀워크에 균열이 생기던 와중에 팀 해체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기 제작자를 만나서 공연 사기를 당했는데, 88체육관에서 공연이 예정되어 제작자만 믿고 열심히 공연 준비만 하던 시나위 멤버들은 막상 88체육관에 가보니 공연 2시간 전까지 허름하게 무대짜는 망치소리가 들리고 말도 안되는 무대가 서있었고, 화가 난 신대철은 공연 주최측과 싸운뒤 술마시고 뛰쳐나가고, 다 만들어지지도 않은 공연장에서 줄이 안 보일 정도로 많이 와서 기다리는 팬들을 돌려보낼수 없었던 김종서와 서태지가 단둘이 엉성한 공연장에서 안습의 공연을 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시나위는 해체되고 서태지는 실직하게 된다.

이후 김종서와 함께 캔기획[5]에 찾아갔으나 김종서만 영입하고 본인은 거절되었다고 한다.[6]

그 후로도 계속 밴드를 알아보거나 직접 멤버를 모집해 밴드를 결성하기 위해 시도하기도 했고, 한국에 비해 음악시장이 활성화되어있는 일본에서 활동하기 위해 일본어를 공부하기도 했다.[7]

그러던 중 시나위 시절부터 쭈욱 들어오던 랩음악에 심취해 새롭게 뭔가 획기적인 그룹을 한번 만들어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며 기행을 벌이기 시작한다. 전 매니저 최진열이 서태지 부모님에게 직접 들은 바로는 한때 마치 와불면벽 하는 스님처럼 어머니가 차려서 방에 넣어주는 밥만 먹으면서 6개월간 방 밖에 나오지 않고 랩연습과 컴퓨터 음악 작곡 공부에만 몰두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무궁화 밴드라는 밴드의 일원으로 무대에서 용돈을 벌면서 마이하우스라는 클럽에서 일하다가 알게 된 지금의 양현석을 만나게 되고, 92년에 양현석과 잦은 멤버교체 끝에 마지막에 최종적으로 합류한 이주노와 함께 서태지와 아이들을 결성했다.

idoltaiji.jpg

메탈밴드에서 미소년계 댄스 아이돌로 변신한 모습.(특종TV연예의 심사 위원 전영록은 메탈밴드의 서태지가 이렇게 앳되고 이쁜 얼굴인 줄 몰랐다고 말하기도 했다.)

결성 후 방송, 라디오 등 각종 매체 활동을 하다가 MBC의 특종 TV연예라는 프로그램의 신인 무대[8]에서 작곡가나 작사가들이 신인 가수들을 평가하는 코너를 통해 난 알아요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9] 그 당시 심사위원의 평가는 이러했다. (박한 평가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작곡가 하광훈 : 참신하지만 리듬은 좋으나 멜로디 라인이 약하다.(8점)

밴드 다섯손가락 멤버였다. 바비킴변진섭조관우, 이루에게 곡을 줬다. 현재 예당엔터테인먼트 음악본부장으로 임재범의 빈잔을 편곡했다. 그리고 하광훈은 무려 20년이 지난 2011년까지도 악플에 시달리게 되었다.(…)#

작사가 양인자 : 음악은 새로운데 가사의 내용은 진부하다고 지적.(7점)

한국 록계의 초기 거장 김희갑의 부인이자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 작사, 드라마 작가 출신으로 김수현 작가의 동기로 한큐에 정리.

방송인 이상벽 : 노래는 섬세한데 과격한 댄스동작에 묻힌거 같다.(8점) 

아침마당의 전 수장.[10] 지금은 불교티비에서 프로그램 진행중. 당시 특종 TV연예에서는 연예평론가로 소개되었는데 당시 그에 대한 칼럼을 많이 썼다. 덧붙이자면 세시봉 멤버의 일원이었다. 물론 직접 노래한 건 아니고 당시 세시봉에서 사회를 봤다고. 연예 및 음악 평론은 그 당시부터 시작했다고..

가수 전영록 : 새장르를 열었다는거에 관심을 표했지만 평가는 시청자에게 돌리겠다.(8점)

황해 & 백설희라는 1950~60년대의 전설적인 배우 & 가수 부부의 아들이자 딸인 전보람은 티아라의 멤버. 자신 자체도 발라드록의 대가이다. 2008년 17집 발매.


결국 평균 7.8점으로 신인무대 첫회 출연자이자 최저점을 기록했다. 이게 왜 최저점이였냐면 이 프로그램이 끝날때까지 출연한 신인가수중에 평균 8점 이하의 가수는 없었기 때문이다.[11]
당시 평가는 위에 언급된 특종 TV연예 코너의 심사위원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랩음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던 시절이었기에 당시 매니저를 맡고 있던 최진열의 증언으로는 방송국에 홍보용으로 CD를 줘도 들어보고는 "그런 판데기는 이태원 클럽에나 걸어라"라며 집어던지기도 했고, 주변 선배 매니저들도 망할 것이 뻔하다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비록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평론가의 혹평을 받았지만, 그 당시 10, 20대 사이에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던 특종 TV연예의 출연을 계기로 당시 세계 음악 트렌드에는 한참 뒤떨어져 있던 트롯트 발라드 위주의 대중가요에 염증을 느끼던 당시 젊은층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고, '서태지와 아이들'의 광풍이 시작되는 계기가 된다.

그의 첫 곡인 난 알아요가 그야말로 대박을 쳤다. 그 뒤로 2집 하여가, 3집 교실이데아, 4집 컴백홈으로 10대들에게 인기 몰이를 하였다. 활동 기간 내내 컴백홈 표절 의혹, 교실 이데아 악마의 음악설, 사전 심의제 철폐 등 수많은 화제를 낳다가 창작의 고통을 이유로 돌연 은퇴 선언을 한다.

은퇴 이후 미국에서 약 2년간의 잠적기를 가지다 활동 없이 솔로 1집만을 따로 발매하였고, 그 2년 뒤 인디 씬의 연주자들을 모아 한국으로 컴백하여 솔로 2집 활동을 하였다. 그 뒤 일본에서 싱글을 내거나 ETPFEST를 개최하는 등의 활동을 펼치다 38개월 만에 7집 앨범으로 활동한 뒤 다음 앨범인 8집까지 4년 6개월의 오랜 잠적기를 가졌다.

5. 최근의 행적 

2008년 들어서 충남 보령에 알 수 없는 미스테리 서클이 등장하고, 코엑스에 알 수 없는 UFO가 등장해서 사람들은 무엇인지 몰랐지만 결국 서태지의 차기 앨범을 예고하는 것임이 드러났다.

2001년2002년2004년2008년2009년 ETPFEST(Eerie Taiji People Festival)이라는 이름의 락 페스티벌을 기획하고 공연하였다. 2001년에는 일본, 2002년과 2004년에는 잠실 주경기장, 2008년에는 잠실 야구장, 2009년에는 잠실 운동장 내 보조경기장에서 치러졌다. 매번 손해를 감수하고 높은 제작비를 들여 치르다가 2009년에는 실속 위주로 공연을 한 다음 활동을 마친 서태지와 함께 소식이 없다.

6월 15일 서태지 12인치 피규어가 발매되었다. 1500개 한정이며, 100개가 풀린 텐바이텐에서는 1분만에, 1400개가 풀린 이티피샵에서는 20분만에 완판되었다. 바디는 레인맨이 제작하였으며 헤드는 박지훈이 제작하였다. 8집 활동 중 휴먼드림을 컨셉으로 한 피규어이며, 실사를 구현하기보다는 캐릭터성을 살렸다고 한다.

97년도 스포츠 서울이 서태지가 96년 12월 24일 미국에서 주유소를 운영하면서 재미동포 여대생 김모양[12]과 결혼했다는 지금 밝혀진 사실과 똑같은 특종기사가 났으나 서태지측이 부인하고 명예훼손 소송등 강경대응방침을 밝히면서 세간 오보로 결론지어져 버렸고, 2000년 솔로2집 한국에 다시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기자회견 당시에도 결혼계획에 대한 질문에 본인이 여자친구가 없다고 말해 미혼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미 결혼을 했으니 여자친구가 없다는 말은 틀린게 아니다.

하지만 2011년 4월 21일, 인기배우 정우성과 열애중인 이지아와 이혼을 했으며, 2011년 이지아에 의해 재산분할 고소가 진행 중인 것이 밝혀져 여러모로 파문을 일으켰다. 결혼을 한다는 기사가 나와도 대박인데 이혼이라니!!!!! 소송 자체가 워낙 쇼킹했지만 그에 못지 않은 루머도 대거 양성됐다. 위장이혼이다, 애가 있다, 심지어 미성년자랑 동거, 감금설까지;; 다른건 그렇다치고 미성년자 얘긴 둘이 처음 만난 시점 때문에 와전된 듯.상식적으로 그나이(16살)에 부모몰래 동거가 말이 되나? 참나..그당시 서태지는 국내에서 활발하게 활동중이었었다. 자세한내막은 입장발표문 보고 각자 알아서 판단해보자. 
서태지소속사 입장 발표 [13] http://sports.khan.co.kr/news/sk_index.html?cat=view&art_id=201104301629174&sec_id=540101

이 소송은 이지아가 소송취하를 신청하고 서태지가 반려했다가 합의서를 제출함으로서 마무리 되었다. 하지만 루머는 지금까지 끊이질 않고... 
소송에 대한 전반적인 과정 요약 정리


2012년 3월 23일에 데뷔 20주년을 맞이하여 서태지의 음악역사를 되짚어보는 서태지 아카이브 홈페이지를 공개했다.#

2012년 12월 27일 청담동 클럽 엘루이 에서 20주년 기념 파티를 개최했다. 본인이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각종 게임행사 및 공연, 그리고 깜짝 전화연결을 하기도. 클럽안에 모인 2천여명의 매니아들은 열광했다.#

2013년 5월 15일 배우 이은성과 재혼한다고 발표했다.# 
2014년 8월 27일 아빠가 됐다. 관련기사

2014년 8월 28일 9집 앨범 프로모션을 시작했다. 관련기사 해피투게더에도 출연이 확정되어 많은 기대를 모았으나, 다인원 토크쇼인 해피투게더의 콘셉트와는 맞지 않게 서태지와 유재석의 1:1 토크를 한다고 해서 논란이 되었다.기사

2014년 10월 2일 서태지 작사, 작곡, 편곡, 아이유 보컬인 싱글 소격동이 발매되었다. 장르는 일렉트로니카. 청중들의 엇갈리는 평점과는 별개로 또 표절 논란이 일어나 검색어 자동완성에도 상위 랭크되어 있는 상태이나, 평론가들은 분위기가 비슷할 뿐이라는 의견이 대다수.

6. 인간관계 

아이들 시절에 은퇴 이전에는 그나마 조금씩 정보가 있었으나 서태지와 아이들 해체 이후로는 지구에 살고 있기는 한 건지, 진짜 살아 있기는 한 건지도 확실하게 알 수 없다. 그래도 양현석이랑 이주노의 말을 들어보면 레코딩 작업에 들어갈 때는 지금이랑 별 다를 바 없었다고 한다. 실제 양현석이 앨범 녹음을 마치고 서태지만 마무리 작업을 위해 미국에 남아있고, 자기는 한국에 왔는데 몇 달이 지나고 서태지 사망설이 나오자 실제 죽은 줄로만 알았다고(...) 했다. 그 때에도 특히 연락이 안되어서(...).

서태지컴퍼니 소속이었던 밴드 도 서태지와의 관계를 친하기는 한데 얼굴보기는 하늘의 별따기보다도 힘들 정도의 관계(...)라고 표현했다.

몇몇 지인들이 예능에서 서태지와의 친분 관계를 알리기도 했으나, 서태지 쪽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듯 하다.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에도 다른 멤버들과 거의 개인적으로 어울리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고 하며, 친구 한 명을 만나기 위해 매니저에게 부탁한 것을 제외하고는 활동 내내 아무도 사적으로 알고 지내는 사람을 본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나마 가장 친한 관계로 알려진 사람이 친척인 신해철과 가수 김종서인데 이 둘은 2006년 겨울쯤에 같이 스키여행을 다녀온 것이 알려질 정도로 친한 사이라고 한다. 2014년 9월 15일 디스패치가 김종서, 박신혜와 빵집에 있는 서태지의 사진을 공개함으로 김종서와는 꾸준히 교류 중인 듯 하다. (박신혜는 아내 절친이라고 한다)

2014년 9월에 라디오 스타에 신해철이 출연, 서태지와 비슷한 시기에 음반을 내놓으며 누가 흥하냐 내기를 걸었다고 한다. 몇 달에 한 번씩은 꾸준히 본다고도 언급해서 확실히 친척관계(...)는 그나마 좋은 듯.

7. 한국 음악사에 남긴 의의 

서태지의 문화적 파급력은 10대위주의 문화인 아이돌이나 댄스음악에서도 음악성과 예술성을 추구하게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실제 서태지 이후 대중가요의 중심이 된 아이돌 그룹 H.O.T.는 그 대중적 인기와는 별개로 끊임없이 음악적 역량을 보여줄 것을 요구받았고, 나름의 작곡 활동 등으로 어필하였지만 계속해서 서태지와 비교받았다. 이후 무릎팍도사에 출연한 강타가 당시의 스트레스를 이야기하기도.

또한 기획사와 소속 연예인들의 관계가 사실상 노예계약에 가까운 90년대 초, 서태지는 1집 활동의 수입 대다수가 기획사에 넘어가는 것을 보고 이러한 불공평 계약을 깨뜨린 후 본인이 직접 소속사를 설립하고 매니저를 기용해 활동했다. 서태지 이전 아티스트들이나 비슷한 시기의 가수들이 여전히 소속사로부터 불공평한 대우를 받던 상황이었기에, 서태지의 이러한 행보는 이후 가수들의 입지를 상승시키는 촉발제로 작용하였다.# 문화 평론가 강헌은 서태지의 이러한 행보가 당시 유착관계였던 음반제작사, 방송사, 언론 모두에 밉보이게 되는 계기로 보았다.

공연윤리위원회(일명 공윤)의 사전심의제도 폐지라는 성과를 일궈낸 인물이기도 하다. 사전심의제도란 새로운 노래가 나왔을 때 문제가 될만한 부분이 있는지 공윤에 사전검열검사를 맡는 제도인데 여기서 시대유감의 가사 중 일부가 지적을 당하자 이에 빡친반발한 서태지가 시대유감에서 가사를 아예 통째로 들어낸 상태로 앨범을 발매함으로써 사전심의제에 항의를 한 것. 물론 서태지 이전에도 사전심의제도 폐지를 위해 노력해온 가수들은 많았다. 대표적으로 정태춘 옹. 서태지는 이런 선배들의 업적에 기승하여 끝물을 뽑은 것에 불과하다는 말도 있다. 그래도 일단 서태지 대에 이르러서 사전심의제도가 폐지된 것 자체는 큰 의미가 있다. 서태지 팬덤의 힘을 등에 업고 사회 이슈화되면서 국회에서까지 거론되는 상태로까지 발전, 결국 사전심의제도에 막타를 날렸기 때문.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선배 가수들이 지속적으로 제기해 온 화제가, 서태지를 통해 10대 및 20대에게 인식됨으로써 사회적 분위기 형성에 기여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일에서 서태지의 역할은 과대평가되었다. 예를 들어 단순한 날짜만 봐도 시대유감이 논란이 된 것은 1995년 9월 한국공연윤리위원회가 불가판정을 내렸으나 1995년 10월 5일 서태지가 이를 씹고 무가사본으로 음반을 발표했기 때문인데 이는 1995년 8월 30일, 이미 당시 여당인 민자당(민주자유당) 국회의원 박종웅 의원의 주도로 공청회를 거친후 음반 사전심의를 폐지시키기로 확정발표된 이후의 일이다. [14]

가요 시장을 완전히 엎어버렸다. 트로트 가수인 주현미가 3년 연속 가수왕 먹던 시절에 등장한 서태지 이후 가요판은 완전히 10대 위주의 댄스 뮤직이 점령하게 된다. 90년대 초반만 해도 다양한 연령대의 음악들이 순위 프로에 나왔다. 물론 서태지와 아이들 이전에도 댄스그룹은 많이 있었으나, 서태지급의 팬덤을 가지고 조직적으로 성장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국내댄스음악의 부흥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으로부터 보는 경우가 많다.


8. 패션 문화 선도 

서태지는 거리패션에 많은 영향을 미치면서 1990년대 패션유행을 선도했다. 1집 〈난 알아요〉에서는 밝은 랩댄스곡에 어울리도록 상표태그를 떼지 않은 원색 의상과 컬러풀한 티셔츠를 착용한 스쿨룩 패션을 선보였고 2집 〈하여가〉에서는 새로운 장르인 레게와 힙합에 맞춰 힙밥바지와 레게머리를 했다. 힙합바지는 방송불가 판정을 받아 다른 스타일로 금세 바꿔야 했지만, 레게머리는 청소년층에 많은 인기를 끌었다.특히 2000년에 서태지가 귀국할 때 입고 들어온 삼지창 흑백무늬의 옷은 명절 전후 경향의 옷가게에서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었다.

서태지 패션이 이렇게 인기를 끌게 된 데에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입을 수 있는 유니섹스 디자인이라는 점과 비만 등으로 열등감을 갖기 쉬운 몸매를 드러내지 않아 몸매에 민감한 젊은 세대들에 영향을 끼치는 등의 사회적 요인 또한 작용하였다는 시각도 존재했다.

9. 서태지 팬덤과 안티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3집으로 서태지는 일개 인기 가수가 아닌 한국의 문화를 좌지우지하는 그야말로 '문화 대통령' 대접을 받게 된다. 1, 2집에서 아이돌적인 색채가 좀 더 뚜렷했다면 3집부터는 좀더 성숙해진 이미지로 탈변, 본격 헤비메탈 사운드는 차치하고라도 가사도 교육 제도를 비판하고 통일을 노래하는 등 구체적으로 사회 참여를 시도했다.

대한민국에서 '안티'라는 단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서태지 안티'부터다.[15] 서태지의 성공에 더불어서 서태지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게 되었다. 그보다 당시 언론은 서태지를 온갖 논조로 사골처럼 달달 달여내 서태지라는 인물상에 대한 거품을 엉망진창으로 부풀렸다. 서태지 교실이데아를 거꾸로 틀면 '피가 모자라'라는 말이 들린다는 이야기가 언론에 의해서 괴담처럼 퍼져나가고, 서태지 사탄 숭배설, 게이설, 임신설 등이 신문 지면상에 올라갔다. 당시의 언론의 황색 작태는 대중들에게 서태지라는 인물에 대해 금기 또는 과도한 천재상을 부여할 만큼 지나쳤다. 확실히 스타로서는 이 이상 없을 정도로 대성했다고 할 수 있지만 아티스트 서태지의 담백한 부분이 이런 소요 속에서 상당히 비중을 잃고 묻혀버린것이 사실이었다.

온갖 뉴스를 만들어내는 폭풍의 핵인 서태지라는 인물에 부여됐던 과도한 환상은 거품이 빠져버리고 서태지가 창조한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다 미쿡 꺼 따라한 거다 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덧씌어진다. 사실 지금이야 아예 미국 작곡가에게 가요를 의뢰하는 시대라 어이없는 트집잡기지만, 당시는 외국문화에 대해서 훨씬 배타적이었던 90년대의 일이다. 이후로도 서태지가 패션, 음악적으로 서양의 것을 수입했다는 비판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그다음 안티가 본격적으로 양산되기 시작한 시점은 솔로 2집 시점부터이다. 당시 옐로 저널리즘이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서태지가 신문들에 대해 협조적으로 나오지 않자 무지막지한 수준의 원색적인 비난을 담은 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세션으로 인디 밴드의 멤버를 데리고 공연을 하자 인디씬 역시 반발하여 안티 서태지 공연을 하는 등 다양한 악재가 겹쳐 안티가 대거 양산되기 시작하였다. 이 때를 기억하는 서태지 팬들은 그 때가 말 그대로 인터넷 전쟁이었다고 증언한다. 인터넷 전쟁이라는 곡은 실제로 6집에 수록되어 있다. 그야말로 '수입상 서태지', '가짜 천재 서태지'에 대한 마녀사냥에 가까운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이 때는 인터넷에서 서태지를 까는 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의 대표자로서는 서태지 인형에서 순대를 뽑아 먹고 불태우는 퍼포먼스를 해 주목받았던 인디밴드 노브레인이 있다. 노브레인 이외의 안티 서태지 운동을 하던 인디밴드들은 서태지가 저항을 상품화 해 돈을 벌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것이 사회에 대한 저항을 내세우는 자신들을 분노하게 했다고 한다. 이후 노브레인이 사실상 상업적 펑크로 방향을 틀었고, 닥터코어 911은 이정현 무대 뒤에서 핸드싱크를 시전했던것을 생각하면 다소 우스운 면이 있는것도 사실이다.[16]

이런 시기에 서태지 팬들은 안티들이 말하는 대로 서태지가 사기꾼이자 비참한 음악적 역량을 가지고 있는 국수용인지, 아니면 한국을 벗어난 범주의 평론가에게도 가치를 인정 받을 수 있는지 좀 더 객관적이고 냉정한 평가를 받기위해 자비를 들여 어떠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는데 바로 서태지 리뷰팩이라고 하는 소포를 보내 해외웹진에 리뷰를 의뢰하는 프로젝트였다. 이런다고 서태지의 음악성을 객관화하고 서태지 음악의 수준을 부정하는 시각을 설득할 수는 없겠지만, 서태지 리뷰팩이라고 하는 이 소포에는 6집을 포함한 서태지의 모든 앨범과 가사번역본, 뮤직비디오, 연혁 및 소개가 동봉되어 있었다. 이런 움직임은 결국 해외웹진에서 서태지 6집에 대한 리뷰가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평가도 꽤나 다채롭게 나왔다. 대체적으로 준수하다는 평이 많았지만 Korn의 음악스타일 아래에 있다는 문제점이 거의 대부분의 리뷰에서 지적되었다. 이 평가가 거슬린 건지 맘에 든 건지 무시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2004년 1월 29일에는 그 Korn을 Fear Factory와 함께 초청해서 공연하기도 했다. 당시 공연상황

서태지의 2000년대 중반 이후로는 서태지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서태지 팬 외의 음악팬들이 지나친 서태지 팬들의 서태지 신격화 내지는 후한 평가에 반발하여 소위 '빠가 까를 만든다'라는 식으로 안티가 된 경우도 상당수 있다. 
서태지 팬덤에 대해서 유난히 극성스럽다, 자부심이 강하다는 지적 또는 인식이 많이 퍼져 있다. 이 인식이 때때로 강조되어 서태지 팬들이 광신도처럼 인식되는 경향도 있지만 이는 특정 표본 등을 중심으로 설정된 과장된 인식이다. 일반적인 차원에서의 서태지 팬덤에 대해서 말하자면 인터넷 등에서의 민간 차원의 갈등 외에도 대형 언론의 자의적이고 편파적인 보도 등, 외부에서의 이런저런 형태의 지속적 공격을 받아온 서태지의 팬층이, 반대로 유독스러운 결속력과 방어심리를 보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른바, 까가 빠를 만드는 것이다. 팬의 입장에서는 납득할 수 없는 이유나 곡해된 해석에서 기인한 비판이 주어진다면, 매우 의견이 다른 팬의 입장에서는 항의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다. 실제로 사전심의제 폐기 운동, SBS '한밤의 TV연예'에 대한 광고철회운동, 황색언론반대연합, 대중음악판바꾸기위원회, 대중음악개혁을위한연대모임 등의 활동에 서태지 팬들이 참여하게된 동력의 원천은 서태지와 관련되어 있는 불합리였다. 이로 인한 사회적 성과는 작지 않다고 서태지 팬덤은 말한다.

서태지의 데뷔부터 긴 시간이 지나면서, 서태지의 팬덤도 연령층과 깊이가 확대되고 따라서 음악적 지평도 확대되었다. 꾸준히 신규 유입되는 팬들과 10대에서 30대까지 넓은 연령층에서 수많은 팬들이 활동하고 있다. 서태지의 음반이 음반 불황 속에서도 최상위의 수요를 확보하고 있는 것은 서태지의 팬들의 정열적인 활동을 보여주는 지표라고 할 수 있다.

반면, 2011년 이지아와의 관계가 밝혀진 이후로는 그의 음악과는 무관히 서태지의 사생활에 대해 실망하고 돌아서서 그를 비판하는 이들이 안티의 다수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2013년 5월경 배우 이은성과의 결혼 소식이 전해진 이후, 팬덤에서 오래 함께한 팬들의 일부가 돌아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들 중 특히 극성스러운 일부가 안티 사이트를 개설하고(혹은 몇몇 팬사이트가 자연스럽게 안티화되기도 했다) 자신들이 서태지에 대해 매우 잘 안다는 점을 역이용하여, 포털 등에서 서태지에 대한 정보를 교묘하게 왜곡한 루머성 댓글을 게시하고 다닌다는 정황이 자주 포착된다. 결혼 발표 직후의 이들의 언행을 지켜본 팬들에 의하면, 이들은 '오빠가 우리를 배신하고 결혼했다'는 정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아내 이은성과 출산한 딸에 대한 무차별적인 언어폭력까지 목격되기도 했다. 연애감정으로 팬질을 했다는 것인데, 그간 서태지 팬덤의 동력원으로 여겨지던 엄청난 팬심 중에 적어도 일부는 이러한 병적인 집착이었다는 점이 드러나자 팬들이 실망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서태지에 대한 과도한 실드로 수많은 서까를 만들던 사람들이 탈덕해서는 서태지에 대한 도를 넘은 악성 댓글을 달고 있으니 여러 모로 민폐를 끼치다 갔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의 행위가 도를 넘다 보니 서태지에 대해 합당한 비판을 제기하는 분들이나 단순히 서태지를 좋아하지 않는 분들, 또 악성 댓글행위를 하지 않고 조용하게 탈덕하신 분들의 의견조차 자칫하면 이러한 비정상적인 행동들과 동일선상에 놓여 비난받을 수도 있는데, 이는 서태지 팬들이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10. 그외 

  • 서태지가 해피투게더에 출연한다.
  • 경찰은 서태지 자택침입 사건을 불구속 기소 송치했다.
  • 서태지의 골수팬이 자택침입을 했다가 체포됐다.
  • 서태지와 아이들로 활동할때, 그의 매니저가 이동중인 차안에서 당시로서는 일반인은 홍콩영화에서나 보던 수백만원대의 비싼 초창기 핸드폰을 직업상 사서 사용하는 모습을 보게된 서태지가 호기심에 그게 얼마냐고 물었고, 특별히 자신에게 말을 먼저 걸거나, 뭔가 일외적으로 다른일에 호기심을 보이지 않던 서태지의 이례적인 행동에 장난기가 발동한 매니저는 서태지에게 "야, 이거 만원도 넘어...살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말없이 웃던 서태지는 일주일뒤 그 다음번 매니저와 함께 차에 타게 되자 매니저에게 진짜로 만원을 주면서, "그거는 나주고 형은 이걸로 새거하나 사"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게 2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세상물정에 어둡고 악기 구매할때 물건값 흥정도 못해서 항상 다른사람이 나서서 해야 했다고 한다. 서태지와 아이들 활동시의 수익을 분배할때도 액수를 묻지도 않은채 항상 "부모님에게 보내 달라"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돈도 거의 가지고 다니지 않아 별명이 서크루지.그러면서 집에 RC는 한가득 있다.
  • <컴백홈>을 패러디한 <컴배콤>이란 곡이 있었다. 음치가수 컨셉으로 데뷔한 개그맨 이재수의 작품(?)이었는데, 망했다. 패러디로서도 후진데다가 서태지한테 고소까지 당해 데꿀멍. 서태지가 음악 저작권 협회를 탈퇴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코믹한 컨셉으로 패러디한 것 때문이 아니라, 창작자인 자신의 동의도 받지 않고 멋대로 패러디 했다는 것을 문제삼은 것이다.
  • 서태지는 리메이크곡이 없는 이유에 대해 자신의 음악을 팬들과 자신만 공유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직접 밝혔다. 가끔 YG엔터테인먼트나 서태지컴퍼니 소속 가수들이 라이브나 방송에서 서태지의 곡을 리메이크하다가, 최초의 레코딩 버전 리메이크로 빅뱅이 서태지와 아이들 4집의 '필승'을 빌렸다. 후에 응답하라 1994 OST에서 리메이크가 성사되어 성시경이 서태지와 아이들 2집의 '너에게'를 불렀다. 발라드곡을 발라드 가수가 부른 격. 성시경은 나레이션에 특히 신경을 많이 썼다고 전해지는데(...).
  • 스튜디오에서 보드 장갑에 보드복을 입고 노래를 하는 등으로 우리 나라에 생소하던 스노보더의 복장과 문화를 소개하여 스키장에서 마이너였던 보더들이 스키를 누르고 대세로 올라게는 계기가 되게 하였다. 심지어 스노보드 종목인 프리스타일이란 이름의 곡도 있다. 세계적인 스노보드의 유행이 서태지가 등장한 때와 겹친 영향이 더 크지만, 서태지와 아이들도 하나의 기폭제가 되어 주었다. 실제로 서태지와 함께 시나위에 있던 김종서, 이주노[17]는 우리 나라 스노보드와 스케이트보드 쪽에서 거의 1세대이다.
  • 노래 가사에서 알 수 없는 가사[18]가 많이 나온다.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에는 괜찮았지만 솔로 데뷔 이후 그 경향이 심해졌다. 그래서 한 때 팬들에겐 그런 구절들이 무슨 말인지, 무슨 뜻인지 해석하는 것도 유행하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좀 많은데, 2집의 죽음의 늪 후렴구 가사 중 '피하지 않겠어' 뒤에 나오는 가사나, 3집의 교실 이데아에서 '그걸로 족해 족해'이후 가사집에 적혀있지 않은 목소리[19], 6집의 탱크에서 0:28에서부터 0:39에서까지 나오는 기타음 같은것이나[20], 심지어는 5집의 Take 3처럼, 가사집을 보지 않으면 가사가 전혀 들리지 않는 곡까지 있다!
  • 데뷔 초기부터 위천공(위에 구멍이 나는 병. 원인은 여러가지이다. 과로, 과음 등등)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래서 회식이나 술자리에선 술은 그냥 혓바닥에 할짝거리는 정도로(...) 그쳐야 했다고. 공개적인 행사에서 샴페인을 마실때도 샴페인 거품을 앞니로 깨물기만 하고 마는 모습도 보여주었다.[21] 너무 힘들 때는 한 끼 식사를 우유로 떼워야 했다고 한다.동안과 술을 등가교환
  • 병역에 관해서는 여러 말들이 많은데, 94년말 연예인 병역 비리 파동에 따른 수사결과로 94년에 검찰에서 발표된 내용에 따르면 '서태지는 성격장애로 면제, 이주노는 피부과이상(문신)과 정신장애로 면제, 양현석은 병명미상으로 의병제대'이며, 무혐의로 결론이 났다. 다만 서태지는 인터뷰 등을 통해 면제 사유를 위천공이라고 밝혔고 여기에 인터넷에 흔히 떠도는 서빠들이 만든 자료에서는 학력 미달도 언급하고 있으나, 당시 서태지가 면제 요건을 충족한다는 근거 이상은 되지 못하며, 가수 데뷔 전인 19세에 받은 신검에서 정식으로 면제받은 사유는 성격 장애이다.
    그런데 약 4년 후 수사 당시 상황을 회고한 1998년 6월 29일자 국민일보 이경희 기자에 따르면, "가수 서태지가 만성위염으로,탤런트 배용준이 약시로,영화배우 박상민이 교통사고에 의한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면제대상자로 인정됐다."라고 언급했으며, 1994년 당시 수사는 " 사전조사 불충분과 ‘특혜’와는 거리가 먼 대상자를 문제삼는 바람에 유야무야됐다."고 설명했다.(이 기사는 http://www.kinds.or.kr/에 가입하면 볼 수 있다. 어느 기사가 맞는지는 각자 판단하도록 하자.)
  • 주위 인물과 팬들의 성화로 지금은 담배를 안피운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완전히 끊지는 못한 것 같다. 자신의 컨텐츠에 대해 철저하게 관리하는 성격탓에 흡연장면이 노출되지는 않았지만, 8집 뮤직비디오의 촬영과정을 담은 다큐에서 자신의 테이블에 담배를 올려놓은 모습이 아주 잠깐 나오는 등 정황은 확인된다. 일반인에게 절대 목격되지 않을 곳에서만 흡연+활동기나 콘서트 준비기간엔 금연 정도로 자제하지만 완전히 끊지는 못한 것 같다.
  • 고종 사촌동생 강현구는 강개토라는 예명을 가진 싱어송라이터로 활동 중이다. 서태지의 영향인지 강개토 역시 본인 음악의 작사, 작곡, 편곡, 연주, 엔지니어링 등 모든 작업을 혼자서 소화한다. 개토네이션이라는 밴드를 결성해 디지털 싱글을 중심으로 7장의 앨범을 발매하며 활동하는 중이다. 초창기에는 가면을 쓰고 활동했으나 현재는 가면을 벗은 상태. 결혼식 때는 서태지가 그에게 축하화환을 보내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발매 하는 음악 대부분은 음원 순위 10위권에 랭크 되었으며, m.net 및 곰 tv 뮤직비디오 실시간순위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삼성, 웅진, 두산, 신한, 우리 등 다수의 기업체 음악작업을 진행했으며, '광고음악의 장르가 신세대들의 소비심리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현재는 여러 음악 콘텐츠 제작자로써의 활동은 물론 대학교 실용음악과 학과장으로 재직중이다.
  • 2002 ETPFEST를 개최할때 이미 고인이 된 히데를 섭외하여 초청하였다.[22] 물론 고인이 된 히데는 영상으로 밖에 볼수가 없었고 히데 생전의 SPREAD BEAVER 멤버들이 공연을 펼쳤다. 이는 히데의 첫 해외 공연으로 남게 되었고 유족들은 해외 진출을 열망하던 히데의 꿈을 이루어준 서태지에게 고인이 생전 애용하던 옐로하트 기타를 선물했다. 일종의 바톤 터치의 의미라고도 하고, 박물관에 있느니 좋은 음악인에게 연주되길 히데도 바랄 것이라는 말과 함께.[23] 히데의 부모님은 리셉션장에서 서태지를 만났을때도 연신 감사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 국산 댄싱 리듬게임 펌프 잇 업 시리즈의 제작사 안다미로에서 서태지의 곡을 수록하려 했다. 난알아요/필승/하여가/우리들만의추억/울트라맨이야 등이 범주에 올라서 서태지컴퍼니측에 연락을 넣었는데 수록은 하되 게임에 수록되는 사운드 부분을 직접 편집하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펌프 잇업에 수록된 서태지의 모든 노래는 모두 서태지가 직접 편집을 한 뒤 안다미로에 보낸 것이다. 그와 더불어 자기 노래는 제대로 된 속도에 제대로 된 노래여야 한다며 러쉬 모드도 인정하지 않았다. 대단한 프로정신.[24]
  • 우스개로 서태지가 컴백하면 음악 평론가들도 컴백한다는 소리가 있다.
  • 가수 원미연은 서태지에게 곡을 받은 유일한 여자 가수이다. 원미연의 3집 수록곡인 '그대 내 곁으로'가 바로 그 곡인데, 원미연은 생각만큼 그 노래가 히트하지 못해 서태지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유가 2014년에 서태지가 작사, 작곡, 편곡한 소격동을 내면서 아이유와 함께 유이한 여자 가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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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현 서울도시과학기술고등학교
  • [2] 청와대와 아주 가까운 지역이라 민방위 훈련때는 군인과 탱크까지 쫙 깔리는 살벌한 동네였다고 한다. 어린시절 탱크를 따라다니면서 놀기도 했다고.
  • [3] 이동연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학교 교사들이 학생을 때리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고, 잘못을 했어도 절대로 교사한테 맞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교사가 자신을 구타하려고 하면 학교를 뛰쳐나가기도 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반항아.
  • [4] 정통 메탈을 고집하던 리더 신대철과 달리 김종서는 대중적이고 듣기 편한 록을 주장했고, 서태지는 새로운 음악을 추구했다. 신대철은 서태지에게 고전 록밴드들도 들어보길 권유했으나, 서태지는 고전 락밴드를 듣는 것을 고역처럼 여겼고, 새로운 장르에 더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 [5] 악동클럽에 나온 강승호라는 사람이 대표인 기획사다.
  • [6] 시간이 흐른 뒤 강승호 대표는 엠넷 비틀즈코드 2011년 6월 23일 방영분에 출연해서, "그 당시 악기 만지는 걸 좋아하던 서태지가 다른 회사에 갔다가 레코딩용 콘솔을 보곤 나와 계약을 못하겠다고 통보해왔다"며 아쉬워했다.
  • [7] 매니저 최진열의 증언으로 서태지와 아이들이 일본 공연을 하면서 지켜 본 바로는 서태지의 일본어 실력은 능숙해서 통역없이 혼자 일본에서 생활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한다.
  • [8] 재밌는건 개그맨 지석진도 무명가수 시절 부른 '난 알아요'라는 곡으로 거쳐가기도 했다. 우연의 일치.
  • [9] 흔히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 무대를 특종 TV연예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만, 당시 매니저를 맡았던 최진열씨의 증언으로 그 이전에도 많은 매체에 출연했다고 한다.
  • [10] 공교롭게도 11년 경력의 아침마당을 첫시작한게 고작 이 프로그램 나온지 5일 전이었다.
  • [11] 정확하게는 '8점 셋, 7점 하나'로 평균 7.75지만 끝의 5를 반올림해서 7.8로 발표했다. 그 당시 매니저 최진열이 방송 끝난후 방송국에서 "기껏 출연하라고 해놓고 엿먹인다"라고 흥분할 정도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게다가 서태지는 이 프로그램에서 쓰는 음악도 맡았다.
  • [12] 이지아의 본명은 김상은이다.
  • [13]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서태지 씨는 1993년 미국에서 지인의 소개로 상대방과 첫 만남을 가지게 된 후 한국과 미국에서 서로 편지와 전화 등으로 연락을 하며 서로에게 점점 호감을 가지게 되었고 96년 서태지 씨의 은퇴 이후 미국생활을 시작하면서 둘은 자연스럽게 연인으로서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97. 10. 12. 미국에서 둘만의 혼인신고 마치고 부부로서의 생활을 시작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의 성격과 미래상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또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약 2년 7개월 만인 2000. 06 경 양측은 별거를 시작했으며 결국 헤어지는 수순을 밟고 다시 각자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물론 별거초반에 서로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한바 있으나 이를 극복하지 못했고 서로 완전히 헤어지기로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 [14] 이미 정태춘 등에 의해 위헌제청 걸리고 거대 여당이 폐지확정 발표를 한 시점에서 한국공연윤리위원회가 최후의 발악을 한 것에 불가하지 사실 시대유감이 해당 사건에 공헌한 부분은 폐지에 관한 실질적인 부분이 아니라 사전심의의 부당함을 대중적으로 널리 알렸다 정도로 국한될 수 밖에 없다. 꼬마 민주당(새정치국민회의)이 해당 사건을 공론화하기 시작한 것도 1995년 11월 8일인데 사전심의 폐지법안이 당시 여당인 민자당에 의해 발의된 시점은 10월 28일으로서 오히려 빠르고 본회의를 통과하여 개정공포된 시점은 1995년 11월 17일이고 실제 시행된 점은 7개월 뒤인 1996년 6월이다. 당시 소수야당이던 꼬마 민주당의 주도로 서태지의 인기를 등에 엎고 2~3주도 안되는 시점에서 법안을 통과시켰다는 스토리와 수년간 정태춘 등의 민중가수가 위헌제청(1994년 4월) 및 국회 공청회(1995년 8월 29일)를 하고 거대 여당의 폐지 합의(1995년 8월 30일)를 얻은후 수개월동안 조율끝에 거대 여당의 법안 발의(10월 28일), 본회의 통과(11월 17일)로써 법안을 통과시켰다는 스토리중 어느 쪽이 그럴듯한지 한 번 자문해보자.
  • [15] 대체적으로 노이즈라고 알려져있다. 6번 항목 참조
  • [16] 노브레인은 멤버의 탈퇴와 교체로 밴드의 방향성이 달라진 경우에 속한다.
  • [17] 이주노의 소속가수 영턱스 클럽의 멤버 송진아는 심지어 이주노의 영향때문에 스노우 보드에 빠져 나중에 가수 때려치고 스노우보드 선수가 되었음.
  • [18] 잘 안들리든지, 아니면 분명히 가사는 가산데 가사집에 적혀있지 않다.,
  • [19] 내 사투로 내가 늘어 놓을래 로 추정된다. 아니면 내 사투가 아니라 내 사투리라 추측하기도 한다.
  • [20] 근데 이건 히든가사 보다는 단순한 몬더그린일 가능성이 더 높다.
  • [21] 그러나 전 매니저 최진열의 증언으로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 어려운 자리에서도 체면을 생각해서 술잔을 입에대는 시늉이라도 하라고 했는데도 절대로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것 보면 위가 안좋아서라기 보다 술에 취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듯.
  • [22] 여담이지만 같이 X JAPAN의 멤버였던 파타와 히스도 Dope Headz라는 밴드의 멤버로 참석했다. 후기 영상을 보면 서태지와 대화를 나누는 파타를 볼수 있다.
  • [23] 간혹 과격한 히데 or 엑스재팬의 팬들이 실제 기타가 아니라는 반론을 펴기도 하는데 이는 당시 함께 있던 스탭의 후기가 공개되면서 급짜식됐다.그리고 그냥 페르난데스 시그네이쳐 모델이라면 돈 있는대로 있는 서태지한테 굳이 선물을 하겠는가? 악기 구입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는 서태지인데 말이다.
  • [24] BGA, 스텝, BPM측정까지 모두 다 한다는 얘기가 있지만 그건 사실무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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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내용은 '엔하위키 미러'에서 가져온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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