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이인
1958~1990
가객(歌客)한국 대중음악에서
가창력 본좌가수들을 꼽을 때 사후에도
[1] 꼭 들어가는 가수다. 언더그라운드 가수에서 시작해서 한국의 언더그라운드음악을 주류로 끌어올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2]그도 최고의 인기가수가 된 입지전적인 가수였다.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 출신이다.
1964년에 서울 혜화초등학교에 입학하였으며 2학년 때
충청북도 옥천군에 있는 죽향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3학년 때는 서울에 있는 삼청초등학교로 전학하였다. 당시
전인권이 삼청초등학교 6학년에 재학중이었으나 서로 누군지 모른 채 지냈다고 한다. 그러다가 학군제의 시행으로 5학년 때 수유초등학교로 전학을 하였다. 초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굉장히 좋은 성적을 유지했다.
1970년에는 보성중학교에 전교 4등의 성적으로 입학했다.
그는 보성중학교 때 처음으로 기타를 접한다. 하지만 음악을 알아가면서 중학교에서 최상위권을 유지하던 성적은 조금씩 하락하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부친의 사업이 실패하자 한동안 방황을 한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열심히 공부하여 당시 명문 학교였던
경기고등학교에 지원했으나 낙방한다. 결국
1973년에
명지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명지고등학교에서도 음악 동아리에 가입하였는데 선배의악기에 손을 댔다는 이유로 꾸중을 듣자 이에 격분하여 주먹다짐을 벌인 후(...) 밴드부에서 탈퇴를 당하게 된다. 이로인해 그는 고등학교 생활에 흥미를 잃게 되었고 결국 1학년을 마치기 전이었던
1974년 가족들 몰래 자퇴서를 냈다.
자퇴 후에는 검정고시 학원을 다녔으며
1975년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더 이상 공부에 손을 대지 않았으며 계속 방황하다가 기타를 메고 종로에 있는 한 음악 다방에서 통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것을 시작으로 명동의 큰 무대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이후 밤무대나 여러 곳을 떠돌며
통기타를 연주하며
가수로서 길을 내딛고자 노력했다. 이때 나이를 5~6살은 올려 소개했다고. 이때부터 언더그라운드에서는 주목받는 신인으로 전인권,한영애등 선배 보컬들 사이에서 활동하며 검은 나비,동방의 빛,신촌블루스등의 그룹사운드에서 보컬로 활동했다.
1980년 자신의 이름을 건 데뷔 앨범을 내지만 여러 사정으로 방송에서는 매장되면서 이를 비관한 김현식은
술과
담배에 매달리게 된다. 하지만, 1982년 발매한 2집인 <사랑했어요>가 대박을 거두면서 가수로 자리잡는데 성공했고, 마지막까지 같이 한
동아기획 레코드와 계약한다.
봄여름가을겨울과 함께 제작한 3집 <비처럼 음악처럼>도 30만장이 넘게 팔렸으며 상업적 성공과 호평을 받았건만 그 자신은 술과 담배 그리고 나중에는
대마초까지 건드리며 피폐해져갔다.
[3]지인들의 말에 의하면 정에 여리고 말은 거칠어도 꽤나 섬세했었다고. 친한 후배인
유재하가
1987년 11월 1일 교통사고로 죽을 때도 대성 통곡하면서 한동안
술에 매달리며 슬퍼했었다. 오죽하면 4집을 낼 당시 친구이던
이문세나
함춘호 같은 지인들은 "아프면 약을 먹어야지 왜 술을 먹냐?" 걱정했음에도 그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술을 들이켜 댔다. 이런 생활이 계속되자 그의 몸은 점차 피폐해져 갔다.
1989년 영화앨범 '비 오는 날의 수채화' 를 녹음할 때부터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1990년 5집 앨범을 발표할 당시 의사가 '술을 한 방울이라도 마시면 죽는다' 고 경고할 정도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마지막 6집 앨범을 낼 때에는 그를 이전부터 아끼던
동아기획의 김영 사장을 만나서 "언젠가 술 먹다가 죽고자 했는데..." 라는 식의 말을 할 정도였고 후에는
간경변으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된다.
추가바람
결국
1990년 11월 1일(공교롭게도
유재하의 기일)에 마지막으로 병원에서
동아기획 김영 사장에게
"사장님, 저 괜찮으니까 오늘 퇴원해서 내일 녹음에 들어가야겠어요" 라면서 밝게 전화를 했는데 이 전화를 끊고 겨우 2시간 뒤에
김영 사장은 그가 하늘로 떠난것을 전화로 전해 들었다고 한다.. 어쩌면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고 있었던 걸지도...
추가바람
그의
유작이 된 6집 <
내사랑 내곁에>는 200만장이 넘게 팔리는 초대박을 거둬들였으며
대만에서도
리메이크된 바 있다.
추가바람
데뷔할 때만 하더라도 굉장한 미성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에는 음색을 바꾸려는 본인의 노력과, 평소에 즐겨 하던 술담배의 영향이 겹쳐 대중에게 흔히 알려진 쇳소리가 나는 허스키한 창법을 구사하게 되었다.
무릎팍 도사 김건모 편에서도 잠시 비교용으로 나온 적이 있는데 1집의 <봄 여름 가을 겨울>과 6집 <내 사랑 내 곁에>의 음색은 서로 다른 사람이라 생각될 정도로 1집에서는 정말 놀라울 정도의 미성이었다. 1집의 타이틀 <봄 여름 가을 겨울>, 2집의 <사랑했어요> 등에서 나타나는 그의 보컬은 특유의 미성과 가성의 능숙한 사용으로 쭉쭉 뻗어올라가는 고음을 보여준다. 이후 목소리가 상당히 바뀐 3집의 <비처럼 음악처럼>을 들어보면 미성이 상당히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과는 다른 거칠거칠하면서도 애절한 음색으로 변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본격적으로 목소리가 바뀐 것은 4집 이후로 특히 유작인 <
내사랑 내곁에>가 크게 히트하면서 대중의 인식이 거칠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고정됐다고 할 수 있다.
여담이지만 당시 가요계에서 알아주는 파이터였다고 한다. 가수를 안했으면 건달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별명이
원펀치 쓰리강냉이였을 정도였다. 밴드
김현식과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같이 했던 두 후배
김종진&
전태관은 얼굴에서 멍이 떠날 날이 없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 다른 멤버였던
장기호[4]의 경우 뮤직비디오 찍다가 김현식이 너무 오래 찍는다는 이유로
'야! 악기 싸!' 하면서 가려고 하자 말리다가 김현식의 주먹 한 방에 그대로 실신 KO당했다는 후덜덜한 일화도 있었다.
라디오 스타에서
김종진&
전태관이 이 일을 언급하기도 했다. 다만
장기호 역시 성질머리로는 어디가도 안 밀린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으로 뮤직비디오 찍다가 가려는 김현식을 말리는 과정에서 목소리를 높이면서 화를 낸 것도 주먹세례를 받은 원인이 된 듯 싶다.
그 당시 상황을 증언하는 김종진과 전태관. 역시 원펀치 쓰리강냉이.
그의 아들
김완제 씨 역시 아버지가 엄하고 무서우며 고집이 셌다고 한다.
어릴 때를 떠올리는 김완제씨가수 일과 겸업으로 피자집을 했던 적이 있다.
[5]여담으로
이승철이 스승으로 모시는 가수라고 한다.
[6] 이승철이 이를 언급한 맥락에 따르면 직접 가르침을 사사한 적은 없지만 그의 노래에 큰 감명을 받고 즐겨 듣고 따라 부르는 것만으로도 많은 가르침을 얻었다고 여기는 듯하다.
홀연히 나타난 요한 일렉트로닉 바흐라는 괴짜 일렉트로니카 아티스트가 <비처럼 음악처럼>의 "난 오늘도 이 비를 맞으며 하루를 그냥 보내요"를 샘플링 해서
white hand(...)라는 곡을 작곡했다.
2013년 10월 20일, 김현식의 미공개 노래 9곡을 포함한 "김현식, 2013년 10월"이 공개되었다. "그대 빈들에","외로운 밤이면"등의 미공개곡들과 6집 수록곡중 김현식이 병상에서 재녹음한 11곡이 수록되었다. 죽기직전 피를 토해내는듯한 김현식의 노래를 확인할수 있는 앨범. 음질은 깔끔하진 않지만 그걸 잊을정도로 김현식의 보컬이 모든걸 압도해버린다.
음악적 스타일이라던가 고등학교 중퇴, 젊은 날에 요절, 약물 중독, 반항적인 삶 등
바다 건너 오자키 유타카하고 닮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활동 시기도 겹친다. 다만 나이는 김현식이 위고 사망시기도 김현식이 더 빠르다.
정규앨범
1집 봄여름가을겨울(1980.06.01)
트랙 |
제목 |
작사 |
작곡 |
1 |
봄 여름 가을 겨울 |
김현식 |
김현식 |
2 |
어하둥둥 내 사랑 |
김광식 |
김광식 |
3 |
주저하지 말아요 |
이규형 |
이규형 |
4 |
떠나가 버렸네 |
김현식 |
김현식 |
5 |
당신의 모습 |
김현식 |
김현식 |
6 |
그대와 나 |
김현식 |
김현식 |
7 |
나는 바람 |
김현식 |
김현식 |
2집 사랑했어요(1984.09.20)
트랙 |
제목 |
작사 |
작곡 |
1 |
사랑했어요 |
김현식 |
김현식 |
2 |
회상 |
김현식 |
김현식 |
3 |
어둠 그 별빛 |
정성주 |
김현식 |
4 |
떠나기전에 |
김현식 |
김현식 |
5 |
그대 외로워지면 |
박두영 |
박두영 |
6 |
바람인줄 알았는데 |
양인자 |
김현식 |
7 |
당신의 모습 |
김현식 |
김현식 |
8 |
너를 기다리며 |
김현식 |
김현식 |
9 |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
김현식 |
김현식 |
10 |
변덕쟁이 |
김현식 |
김현식 |
3집 비처럼 음악처럼(1986.12.05)
비오는날 듣기 좋은노래에도 뽑힌그곡.
트랙 |
제목 |
작사 |
작곡 |
1 |
빗속의 연가 |
김현식 |
김현식 |
2 |
가리워진 길 |
유재하 |
유재하 |
3 |
슬퍼하지 말아요 |
김현식 |
김현식 |
4 |
비오는 어느 저녁 |
김현식 |
김현식 |
5 |
우리 이제 |
김현식 |
김현식 |
6 |
떠나가 버렸네 |
김현식 |
김현식 |
7 |
비처럼 음악처럼 |
박성식 |
박성식 |
8 |
그대와 단둘이서 |
장기호 |
장기호 |
9 |
눈 내리던 겨울밤 |
김현식 |
김현식 |
10 |
쓸쓸한 오후 |
김종진 |
김종진 |
4집 김현식 VOL.4 (1988.09.30)
트랙 |
제목 |
작사 |
작곡 |
1 |
언제나 그대 내 곁에 |
김현식,송병준 |
송병준 |
2 |
여름밤의 꿈 |
윤상 |
윤상 |
3 |
한밤중에 |
이정선 |
이정선 |
4 |
이제는 |
김현식 |
김현식 |
5 |
우리네 인생 |
이정선 |
이정선 |
6 |
사랑할수 없어 |
김현식 |
장기호 |
7 |
그대 내 품에 |
유재하 |
유재하 |
8 |
기다리겠소 |
김영배 |
김영배 |
9 |
한국사람(하모니카) |
10 |
우리 처음 만난 날 |
김현식 |
김현식 |
5집 KIM HYUN SIK (1990.03.01)
트랙 |
제목 |
작사 |
작곡 |
1 |
향기 없는 꽃 |
이창수 |
이창수 |
2 |
암울한 분위기. /넋두리 |
김현식 |
김현식 |
3 |
그 거리 그 벤치 |
강인원 |
강인원 |
4 |
도시의 밤 |
김효성 |
김효성 |
5 |
거울이 되어 |
이원재 |
이원재 |
6 |
재회 |
김현식 |
김현식 |
7 |
사랑의 나눔이 있는곳 |
김현식 |
김현식 |
8 |
밤의 고독속에서 |
김현식 |
김현식 |
영원히 잠들고싶소라는 말은 아마도 ... |
9 |
할렐루야 |
6집 내 사랑 내 곁에 VOL.6 (1991.01.26)
트랙 |
제목 |
작사 |
작곡 |
1 |
내 사랑 내 곁에 |
오태호 |
오태호 |
2 |
나의 하루는 |
김종진 |
김종진 |
3 |
겨울바다 |
김선욱 |
최이철 |
4 |
사랑했어요 |
김현식 |
김현식 |
5 |
추억 만들기 |
6 |
사랑 사랑 사랑 |
7 |
이별의 종착역 |
손석우 |
손석우 |
7집 Self Portrait (1996.09.02)
트랙 |
제목 |
작사 |
작곡 |
1 |
원래는 2분짜리 녹음파일이지만 그뒤에 반주를 넣은것. /다시 처음이라오 |
김현식 |
김현식 |
2 |
사랑의 불씨 |
김현식 |
김현식 |
3 |
이 바람속에서 |
김현식 |
김현석 |
4 |
First Of May |
비지스 |
비지스 |
5 |
Rain |
Jose Feliciano |
Jose Feliciano |
2002년에는 sick bed live 병상에서 음반이 나왔는데 유투브에도 딱 네곡만 있을정도로 이제는 거의 잊혀진 음반인데 들어보면 다쉰목소리가 인상적이다.
2. KICPA/세무사 강사.[편집]
공인회계사. 현 나무경영아카데미 근무 중.
1974년 음력
10월 5일(양력으로는
11월 18일)
강원도 고성군 출생.
재무회계 파트 쪽에서 유명한 강사이며 대표적인
독설가형 강사.[7] 같은 학원의 강사이자
고려대학교 3년 선배인 최창규 회계사의 차분한 분위기에 비하면 극과 극이다. 지나칠 정도로 파워풀한 강의로 유명하다. 강의 중에 그야말로 온몸을 다 사용하는 데다가 저러다 목 나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열변을 토하는 터라 이래저래 강의에 대한 몰입감이 높다.
나쁘게 말하자면 살벌하다. 그러니 김현식 강사를 아예 한 번도 접하지 않았다면, 후술하는 여러 특성들 때문에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언행이 거침없고 무자비할 정도로 직설적이다. 수업 중 내내 '너는 그러니까 안 돼', '넌 해도 안 돼', '괜히 헛수고하지 말고 환불해', '꼭 공부 못하는 애들이 ~하지', '데스크 가세요', '환불하세요', '저런 애들 붙잡고 대학 물어보면 뻔하다고'
솔직히 이건 거의 틀린다(...), '이건 너 말고 너네 옆집, 그러니까 공부 잘하는 애들 위해서 해주는 말이야' 등등 마인드 브레이킹성 발언을 그야말로 폭풍우처럼 쏟아 낸다.
특히 수업 중 계산기를 쓰려고 하는 학생들을 대단히 싫어한다. 가끔 수업 중에 "서울대와 지방대는 뭐가 다른 줄 알아?" 라는
지방대 학생들을 비하하는 듯한 발언을 하기도 한다.근데 SKY가 세계 탑 클래스급 대학교 랭킹에 들어갑니까?가만히 듣다 보면 이게 진짜 애정이 있어서, 잘 되길 바라서 그런 건지 아님 정말 비꼬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다.
[8] 아무튼 강사 본인의 생각은 어떻든 저런 언행 덕분에라도 수업에 대한 몰입감만은 정말 최강이다. 그리고 머리에 깊숙히 박힌다. 공부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확실하게 구분해 주기 때문에 수험생 입장에서는 꽤 강의의 시간 대비 효율 비가 좋다. 진짜다.
돈을 정말 많이 번 듯하고 다른 강사들과 달리 대놓고 자기가 잘 산다는 이야기를 한다. 대충 1년에 세금을 1억 넘게 낸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강의 하나에 돈이 얼마 들어오는지까지 자주 언급한다. 미래경영아카데미에서 강의했을 때 학원 대표는 최창규인데 학원이 자기 꺼라는 식의 발언을 많이 하는 것으로 봐서는 학원 지분의 상당 부분을 쥐고 있는 있었던 걸로 추정된다.
잘난 척하는 만큼 잘 가르치기도 하고 자기 말마따나
[9] 사실 정말 열심히 강의한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냥 '난 날 때부터 잘 났어~' 하는 식이 아니라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는 이야기고 실제로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한 사람이다.
[10] 수업 중 자신 인생의 유일한 실패는 대학 입시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장난 치십니까?군대는 회계사 합격 후 갔다왔는데, 경리장교
[11]로 갈 수 있었지만, 특이하게
병사로 군 복무를 마쳤다고 한다.
[12] 본인 말에 따르면 경리장교로 갈 수 있었지만 입대 당시 나이도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었고 경리장교의 복무기간이 너무 길어서 빨리 군 복무를 마칠 생각에 일반병으로 입대헀는데, 입대한 지 며칠 만에 후회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