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2]감독님이 그러더라고, 동원아 우짜노...여까지 왔는데...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알겠심더. 마 한 번 해보입시더" ㅡ스포츠 2.0과의 인터뷰 中
"이제 그냥 '최동원'이라는 글자 석 자가 빛나는 별이 아니라 젊었을 때 나처럼 별을 쫓는 사람들에게 길을 밝혀주는, 그런 별이 되고 싶어요. 야구가 뭐냐고요?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금색 뿔테 안경을 고쳐쓰며) 최, 동, 원 이름 석자였지, 야구가 전부였지... ㅡ그의 생전 마지막 인터뷰 중에
한국프로야구 최고의 투수를 꼽으라면 단연 선동열이다. 그러나 한국 야구 최고의 투수를 꼽으라면 오직 최동원이다. ㅡ관련 기사.
롯데 자이언츠 역대 최고의 에이스이자 부산야구 최고의 보물 전설이 된, 짧고 굵었던 무쇠팔의 가을 사나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 동료를 위해 자신의 특권을 내려놓았던, 실력과 인성을 모두 겸비한 대투수 한국프로야구 올타임 No.1 에이스 선동열이 호적수라고 칭했던 단 한 명의 선수
최동원 이후론 그 누구도 선동열을 대적하지 못한다. 더 놀라운 건, 이 사람은 아마 시절부터 상상을 초월하는[4] 혹사에 시달려 전성기에 많이 못 미치는 수준이 되어 프로에 데뷔했다! 아마추어 땐 그냥 외계인...
그의 투구폼은 용틀임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역동적이었으며, 자기 공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고 공격적인 투구를 했다. 그것은 일본 선진 야구를 배우게 한 아버지의 덕이 컸었다.[5] 부산에서 시청가능하던 일본프로야구 중계방송을 보며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에이스 호리우치 츠네오의 투구폼을 아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최동원의 전매특허인 드롭(낙차 큰 커브)이 바로 호리우치의 주무기였다.
공격적인 투구 성향으로 피홈런률이 상당히 높았다.[6] 더불어 통산 고의4구가 15개 밖에 안 된다.# 1년에 2개도 안 던진 셈. 정말로 공격적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기록이다.
아마 때부터 혹사를 달고 살았기 때문에, 프로 입단 당시부터 부상을 달고 살아서 구속이 많이 느려지고 고생했으나 시간이 지나자 진가가 드러나 몇 년간 선발 중간 마무리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나와 이닝을 소화했다. 덕분에 장명부 다음으로 많은 284.2이닝을 던졌으며, 한 시즌 개인 최다 탈삼진 기록인 223탈삼진 기록을 수립하였다. 이 기록은 2013년 현재까지도 갱신되지 않고 있다. 참고로 이 기록에 가장 근접했던 이가 1996년 221탈삼진을 기록한 주형광이었다. 현시대 최강의 투수로 군림하고 있는 류현진도 200탈삼진 이상은 몇 번 기록해봤지만 220탈삼진 이상을 기록한 시즌은 없다. 투구 전 송진가루, 신발끈, 겉양말, 안경, 모자챙을 차례로 만지고 공을 던지는 버릇이 있었다.
주구종은 직구와 커브였는데 대한민국 역대 최고의 커브라고 한다. 150km/h에 육박하는 속구[7]와 더불어서 빠른 커브, 그리고 완벽히 타이밍을 뺏기 위한 느리고 폭이 큰 커브 등을 무기로 많은 삼진을 잡았다. 공격적인 투구 성향, 그로 인한 좋지 않은 기록[8]도 있지만 그만큼 탈삼진을 많이 뽑아냈었다.
경남고 시절부터 엄청난 투수로서 유명했다. 동 시대의 라이벌이었던 김시진은 최동원이 가장 좋았던 시절로 경남고 1~2학년을 꼽을 정도.
연세대학교 시절, 1978년 대통령기 전국대학야구대회 준결승에서 동아대학교와의 맞대결에서 임호균과 18회 연장 승부는 굉장히 유명했다. 14회까지 0:0으로 진행되자 서스펜디드 게임이 선언되고 다음날로 이어져 결국 연세대학교김봉연의 솔로홈런으로 최동원의 연세대학교가 1:0으로 승리를 거뒀다.
그리고 사건이 벌어진다. 1979년 3월 21일, 대통령기 쟁탈 동국대와의 준결승에서 공군을 제대하고 2학년으로 복학한 박철순이 선발로, 3학년인 최동원이 마무리로 출전하였다. 이날 각각 2점씩 실점하여 경기는 4:2로 패배하였다. 경기에서 지자 연세대 선배들은 패배의 책임을 물어 최동원을 구타하였다.[11] 이때 허리를 잘못 구타하여 팬티가 피범벅이 되고 허리 아랫부분이 시커멓게 죽을 정도로 큰 부상을 입는다. 근 100일 동안 움직이지도 못하고 집에서 요양해야 할 정도였다고. 이 과정에서 학교는 구타사실을 은닉하기 위해 최동원이 무단이탈했다는 언플을 한다.
연세대학교 시절 무시무시한 구위로 국제대회에서 맹활약하자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이 그를 주목했고,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계약까지 했으나 병역특례 혜택을 받은 뒤에도[12] 5년 동안 국내에서 그것도 아마에서만 활동해야 대체복무로 인정되는 병역법 때문에 바로 해외에 나갈 수 없었던 점이 크게 작용했다.[13] 병역말고 메이저리그 계약이 최하급이었다는 말이 있지만 이건 사실과 다르다. 4년에 옵션 20만 달러[14] 포함 총액 61만 달러계약인데 이정도 금액이면 최하급이 아니라 오히려 특급대우다. 연봉도 첫해인 1982년에만 최저연봉인 33,500달러일뿐 바로 다음해 연봉은 66,500달러, 3년차에는 115,000달러, 4년차에는 185,000달러에 달했다. 당시 토론토의 1선발로 4년차였던 짐 크랜시의 1981년 연봉이 167,000달러라는 걸 생각하면 토론토 측에서 상당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수 있다. 아니 애초에 프로리그조차 없던 국가의 투수에게 4년간 연봉을 무조건 보장한다는 시점에서 상당한 기대를 가졌다고 볼수 있다.
그 당시 블루제이스 측에서 해외 언론에 밝힌 최동원의 프로필을 보면 그를 당장 메이저 전력감으로 평가하며 메이저 평균 수준의 직구와 커브 그리고 메이저 상위 수준의 슬라이더와 제구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라는 말[15]도 있고 당시 나온 기사로는 토론토 수상이 직접 한국에 최동원을 위해 병역 면제를 건의했다는 말이 있지만 이건 그냥 단순히 최동원 선수를 알고 있고 관심을 가지고 있다던 기사에서 와전된 말인 듯하다. 다만, 토론토 시의회 의장이 한국정부에 최동원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희망하는 진정서를 넣은 것은 사실이다.# 결국 블루제이스 측에서 계약 위반이라며 법정행 카드까지 들고 나오며 그후 몇년 동안이나 포기하지 않았으나 결국 최동원은 해외 진출을 포기하고 1983년에 롯데 자이언츠와 계약하게 된다. 다른 말로는 당시 프로야구 최대 흥행카드인 최동원이 메이저리그에 가면 흥행에 문제가 생길 것이라 생각한 높으신 분들의 압력이 있었다 카더라...#
그리고 연세대학교 시절 최동원을 보고 가네다 마사이치 감독도 스카웃, 정확히는 양자로 맞이할려고 했으나, 조부의 반대로 인해 무위로 돌아갔다는 얘기도 있다. #관련 인터뷰. 하지만 가네다는 2011년의 인터뷰에서 최동원의 존재는 알았지만 양자 입적이야기는 사실무근이라고 하였다. 2012년 10월 26일 엠비씨 스포츠 스페셜다큐에선 김시진의 증언을 보면 뉘앙스적으로는 단순히 일본진출 방법을 설명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도 최동원에 놀람과 관심을 많이 가졌다는 모양.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최고 수준인 3,000만 원[16]의 계약금을 받고 1981년 실업야구 롯데 자이언트에 입단했다.그때부터 롯데 자이언트의 에이스가 되었다. 1981년 롯데 자이언트가 소화한 팀 이닝이 36경기 324이닝이었는데 그중 206이닝을 신인이었던 최동원이 소화, 17승 4패를 기록하며 팀을 코리안시리즈[17]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는 팀을 위해 코리아 시리즈에서 불태웠다.
김시진, 장효조 등이 포진되어있던 육군 경리단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면서 롯데가 실업야구 마지막 코리아시리즈에서 우승을 하는데 일조했다.
특이사항으로 4차전때 7이닝까지 선발 등판하다 휴식을 주기위해 8회초 1루수로 보직을 변경했고, 8회말 2사 만루상황에서 구원등판해서 깔끔하게 막아 1경기 1승 1세이브를 기록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도 연출한다.[19]
롯데의 우승과 더불어 최동원은 실업야구 최우수선수, 최다승리투수(17승), 신인투수상을 수상하며 3관왕을 차지했다.
1981년 시즌이 끝나고 실업 팀이던 한국전력공사에 이적하여 선수생활을 이어갔다. 이유는 세계(아마추어) 선수권 대회가 1982년에 있었는데 이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소속 팀이었던 롯데는 프로로 전환하였기에 아마추어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던 것. 그래서 날라다니는 선수들을 실업팀에 임시로 입단을 시켰고 이는 임호균, 심재원, 이해창, 김재박. 장효조 등이 한국프로야구 원년에 데뷔를 하지 못한 이유다. 세계선수권대회가 종료된 후, 다시 최동원은 (프로로 전환한) 롯데에 입단했다.
최동원의 프로야구 첫 시즌은 부진했다. 본인 말로는 연봉협상때문에 몸관리를 하지 못해서라고.[20] 1983년 시즌종료후 하루에 천개가 넘는 공을 던지며 몸관리에 들어갔다고 kbs 다큐멘타리에 코멘트가 되어 있다.
최동원이 불멸의 선수로서 자리매김한 경기는 1984년 삼성 라이온즈와의 한국시리즈이다. 당시는 전기/후기리그로 나누어서 전기 1위와 후기 1위 팀에게 한국시리즈 진출권을 주었다. 만일 한팀이 전후기 모두 우승하면 한국시리즈 없이 통합우승.[21]
1984년 전기리그 1위를 달성한 팀은 삼성이었다. 삼성 김영덕 감독은 후기리그에선 선수들을 쉬게 하여 전력을 보존하고, 각 팀을 분석해서 최대한 만만한 팀을 후기 리그 1위로 만든 뒤에 한국시리즈를 무난하게 가져가려고 했다. 결국 후기리그 막판에 완전히 노골적인 져주기 게임을 연발하면서 위협적인 OB 베어스를 떨구고, 대신 롯데 자이언츠를 후기 1위팀으로 만드는 추태를 부렸다.[22] 당시 삼성과 롯데의 마지막 3연전을 중계하던 방송캐스터가 '이 경기를 중계하고 있는 제가 부끄럽습니다.'라는 발언을 할 정도였다.[23][24]
이런 막장같은 상황은 승리를 위해선 무슨 짓이던 서슴치 않는 삼성 김영덕 감독의 사고방식 때문이다. 게다가 OB 베어스 감독(김영덕)과 투수코치(김성근)으로 원년인 1982년 우승까지 이루었던 2명간의 악연이 겹처서 벌어진 일이다. 1983년 시즌 종료이후 김영덕은 감독 사퇴이후 미국으로 지도자 연수를 떠나기로 예정돼있었고, 이 상황에서 김성근에게 삼성 감독직 제안이 들어온다. 김성근은 이걸 김영덕에게 상의했는데, 김영덕은 김성근의 삼성행을 만류한다. 결국 김성근 투수코치는 OB에 잔류하는데, 열흘 뒤에 삼성 감독으로 김영덕이 발표된 것이다. 즉 자기 후배가 갈 자리를 가로챈 김영덕 감독...이 사건으로 1984년 시즌 내내 삼성과 OB 경기는 살벌한 분위기에서 치루어졌고, 난투극도 여러번 불거졌었다.
이에 자존심이 상한 롯데는 최동원을 필두로 반격에 나선다. 당시 롯데 감독이었던 강병철 감독은 한국시리즈를 준비하면서 1, 3, 5, 7차전에 등판하도록 최동원에게 지시를 내린다. 이에 대해 너무 무리하는게 아니냐고 묻자[25], 강병철 감독은 무척이나 미안한 표정으로 두고두고 회자되는 "동원아, 우짜노 여기까지 왔는데"라고 했다. 결국 최동원은 "네, 알았심더. 한번 해보입시더"라고 답변하고 이를 수용한다.
인터뷰어 : 최동원 투수! 컨디션 어땠어요? 최동원 : 글쎄요. 허허. 어제보다 좋았다고 할까요? [27] 인터뷰어 : 무리 아니었습니까? 최동원 : 무리였죠. 무리지만 팀이 이길 수 있다면... 이제 올해 마지막 시합이잖습니까. 그래서 최대한 힘 있는데까지는 열심히 해가지고... 저희들이 노력한 만큼의 어떤 성과를 얻기 위해서는... 무리라는걸 알죠. 알지만 나갈 수 있는 한 끝까지 나가서 이겨야죠.
마지막 7차전에서는 5번 유두열이 힘이 떨어진 김일융을 상대로 역전 쓰리런 홈런을 치면서 우승하게 되는데, 사실 6번으로 나오려던 것을 기록원이 실수로 5번으로 적었고 강병철 감독은 그냥 그대로 가자고 했다 한다. 어찌되었던 이 뜬금포에 2009년 나지완이 로페즈를 제치고 한국시리즈 MVP를 받은 것과 비슷한 논리로 유두열이 한국시리즈 MVP가 되는 해프닝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라는 의견도 있지만, 최동원이 1984년 27승 다승왕, 탈삼진왕으로 정규시즌 MVP로 이미 선정되었으므로 한국시리즈 MVP까지 독식하기는 좀 그렇다는 이유로 유두열이 MVP가 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진실은 저 너머에...[28]
어쨌든 최동원은 1984년 한국시리즈 때 5경기 등판 중 홀로 4승을 거두며(1패) 롯데를 극적인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국내 유일한 기록이다.[29] 한국시리즈 우승 파티 때 최동원이 쌍코피를 흘렸다던가, 기자가 지금 무얼 가장 하고 싶냐고 물었을 때 자고 싶다고 답변한 일화가 유명하다.[30]
결국 1984년의 혹사는 이후 최동원의 선수생활을 갉아먹게 된다.[31] 그러나 그는 은퇴 이후 세월이 흐른 후의 인터뷰에서도 "우승은 나 혼자만의 영광이 아니라 팀과 팬들의 기쁨이기 때문이다.", "무리는 역시 대가가 있게 마련이더라. 그러나 후회한 적은 없다. 다시 그날로 돌아가도 난 1차전부터 7차전까지 던질 거다. 왜냐? 그게 최동원이니까."라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본인의 선수 생명까지 바쳐가면서 구단에 우승을 안겨준 선수에 대한 롯데의 태도는……. 이 때문인지 아래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 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그렇게까진 안던질거다"라는 말도 남겼다(…).[32]
최동원의 선수 생활 중 중대한 고비를 맞이한 것이 1988년으로, 바로 이 때 가장 먼저 선수협을 만들려고 했다. 그 결정적 계기가 당시 해태의 투수 김대현이 이순철과 함께 승용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달리다 휴게소 진입 도중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33] 이 때 최동원은 선수들의 복지를 위해 선수협을 구성하려 했으나 당시 7개 구단들의 반대로 실패로 돌아갔다. 이 사건 이후 연봉협상 등의 이유로 마찰이 심하던 롯데 구단과 완전히 틀어지게 된다. 선수협의 여파로 최동원은 삼성의 김시진 등의 거물투수와 트레이드를 당하게 된다. 이 당시의 트레이드는 규모와 네임밸류에서 역대 최고로, 롯데의 '최동원-오명록-김성현'과 삼성의 '김시진-전용권-오대석-허규옥', 그리고 추가로 롯데의 '김용철-이문한'과 삼성의 '장효조-장태수(투수)'의 총 규모 5대6의 트레이드가 이뤄졌다.
이후 인터뷰에서 롯데에 관한 질문에서 최동원은 "그래요. 롯데는 처음부터 나와 약속[34]을 지키지 않았어요. 이런 상태에서 프로 롯데라고 믿음이 갔겠습니까. 그래도 나는 롯데를 위해 1984년을 통째로 바쳤어요. 하지만, 그 대가가 무엇이었습니까. 그 대가가."라는 것으로서 짙은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렇게 롯데에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최동원은 야구를 더이상 못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미국으로 출국한다. 이후 1989년 후반기부터는 삼성에 복귀하지만, 신혼여행 및 야구를 떠나 방황하면서 체중은 불어나고 그에 더해 전체적인 훈련량이 모자랐던 것 + 그 전까지의 혹사의 여파로 구속도 떨어지고 제구도 안 잡히게 되는 전체적인 기량 하락으로 이어졌고, 지금 관점으로 본다면 야구선수 치고는 이른 나이에 은퇴했다. 인터뷰로는 당시 감독이던 김성근 감독이 가더라도 1년 더하고 가라고 말렸으나, 자신이 강력하게 은퇴를 요청했다고 한다.
요약해서 보는 그의 혹사.jpg 완투율은 70%가 넘었고 규정이닝의 2배를 뛰었다. 그리고 승리를 챙기지 못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전성기가 조금 지나서 프로 데뷔했고 프로팀 실력이 영 좋지 않아서 어쩔수 없이 감독이 미친듯이 굴렸고 미친듯한 성적을 거뒀다는것.
이후 동생인 최수원 심판이 밝힌 바에 따르면, 이미 어깨 인대 2곳이 끊어져 있었다고 한다.#
최동원 측은 메이저 리그 진출을 포기했으니 그에 걸맞는 몸값을 달라며 롯데 측에 요구했는데, 당시 실업야구 롯데 시절 계약금 가운데 절반 이상인 2천9백만원을 약속어음으로 받았다가 롯데 측이 지급을 미루는 바람에 그 돈을 송두리째 떼였던 일이 있던 상황이었다.
롯데는 1억원은 힘들다고 난색을 보였으나 최동원의 태도가 강경하자 결국 편법을 이용하여 1억을 지급하는데, 방법은 이렇다. 일단 롯데는 최동원에게 계약금 5천만원, 연봉 3천만원을 줘 8천만원을 채우고. 실업 롯데시절 미지급한 계약금 2천 9백만원 중 2천만원을 보너스 형태로 추가 지급하기로 하여 총 1억원을 채운다. 다만 몸값은 계약금과 연봉만 발표하자고 요청하여 언론에 보너스는 발표하지 않았다.
연봉협상의 기초가 되는 83년 최동원의 성적은 38경기(선발 21경기) 9승 4세이브 16패 탈삼진 148개 평균자책점 2.89이다. 롯데는 적은 승수와 많은 패수 등을 이유로 한국 최고투수라는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성적이라며 최동원의 연봉을 3천만원에서 2천750만원으로 삭감한다. [35]
84년 최동원은 정규 시즌에서 51경기(선발 20경기) 284 2/3이닝, 27승 6세이브 13패, 평균자책점 2.40을 기록한다. 게다가 한국시리즈에서 4승을 거두며 팀을 우승으로 이끈 전설적인 해이기도 하다.
최동원과 롯데는 84년부터 등판간격과 승수에 따라 보너스 명목의 연봉을 따로 챙겨주기로 이면 계약을 맺었는데, 이에는 당시 연봉상승 25% 상한선 제도가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83년 9승이라는 승수에만 치우쳐 연봉이 깎이는 상황이 되자 최동원의 아버지 측에서 롯데에 제안한 것이기도 하다.
결국 84년 성적을 볼 때 최동원은 연봉과 보너스를 합산시 1억이 넘는 돈을 받았어야 하나 협상 끝에 7천4백만원에 연봉계약을 체결한다. 또한 최동원 측은 롯데 측에 연봉 25%상한선 제도는 독소조항이므로 없어져야 하고, 연봉과 보너스는 모두 연봉으로 계산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롯데로부터 연봉과 보너스를 합한 금액을 연봉으로 발표하겠다는 다짐을 받아낸다.
1985년 20승을 기록한 최동원은 8100만원의 연봉을 받는다. 1986년 19승을 기록한 최동원은 8910만원의 연봉을 받는다. 1987년 14승을 기록한 최동원은 8910만원으로 연봉이 동결된다.
이에는 롯데와 최동원 측이 맺은 이면계약 합의서의 내용에 기반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15승을 기준으로 15승을 거둘시에는 동결. 15승 미만의 승수를 거둘시에는 연봉삭감. 15승 이상 거둘시에는 연봉상승. 참 쉽죠? 대표적으로 87년 동결된 연봉계약의 이면계약 합의서의 내용은 23승 이상(25% 상승), 22승(22% 상승), 21승(20% 상승), 20승(15% 상승), 19승(10% 상승), 18승(8% 상승), 17승(5% 상승), 16승(2% 상승), 15승(동결), 14승(2% 삭감), 13승(8% 삭감), 12승(15% 삭감), 10승(20% 삭감)이다.
1988년 연봉이 동결되기까지의 과정이 우여곡절이 긴데, 이면계약서 내용에 따라 14승을 거두면 2%가 삭감되지만, 2세이브는 1승으로 친다는 조항 역시 존재하였고, 마침 최동원은 2세이브를 기록하였기에 계약내용에 따르면 동결이었다. 이 과정에서 한 언론사가 "약간의 연봉 인하 요인이 있으나 에이스라는 점을 감안해 깎지 않기로 했다."는 롯데의 입장을 기사로 내면서 최동원 측의 반발이 시작된다.
은퇴 후엔 의류사업가로 나서 뒷모습 누드 사진을 넣는 파격적인 광고를 선보이다 망했고, 1991년 광역의원(부산 시의원) 선거에서도 낙선[36], 방송계에 진출하여 걸출한 입담을 과시하며 여러 군데를 전전했다. 이 때문에 나이 어린 사람들은 연예인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아 많은 롯데팬들이 씁쓸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37]
건강한 사회를 향한 새정치의 강속구 꼬마 민주당 소속의 최동원. 선거 포스터 또한 최동원 스스로 직접 디자인했다고 한다. 정치계에서도 상당히 세련된 구호로 평가되었다. 20여년 전의 포스터임을 상기하자.
야구 해설가로 야구계에 복귀했고 한화에서 불러 한화 투수코치로 있으면서 류현진 성장에 이바지[38], 이후 한화 이글스 2군 감독으로 활동했다. 대장암으로 요양하느라 2군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고 한다. 때문에 2009년 시즌부터는 2군 타격코치였던 우경하가 감독직을 계승했다.
은퇴 후에도 롯데 팬들은 최동원을 간절히 찾았다. 마침 5위로 2008년 시즌을 마친 한화 이글스가 최동원 감독과 재계약을 안 한다는 기사가 떴고, 이에 롯데 자이언츠 팬들은 롯데 프런트와 최동원 간의 과거사 때문에 부정적으로 보면서도 "없는 자리를 만들어서라도 최동원을 모셔오자"라고 하는 등 급반응을 보였으나...결국은 KBO 경기감독관에 임명되었다. 여전히 야구계에서 그의 입지는 좁다. 롯데에 오고 싶어도 프런트 및 양상문 당시 2군 감독[39] 때문에 힘들 것 같다는 게 대세. 그리고 암투병 경력 등 이래저래 건강이 좋지 않아 일이 많은 1군 코칭스태프는 현실적으로 무리다.
2009년 시즌부터 롯데 자이언츠 기념관이 생기면서 역대 레전드의 유니폼이나 장비들을 전시했는데 최동원 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롯데와 최동원의 관계를 보여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래도 나중에는 최동원 칸도 채워졌다.
2009년 7월 4일, 최동원은 21년만에 롯데 유니폼을 입고서 사직에서 감격적인 시구를 했다. 21년 만에 롯데 유니폼을 입은 최동원의 시구는 많은 화제가 되었고, 당시 중계를 하던 KBS N 스포츠에서 특별히 캠을 가까이 붙여서 최동원의 역동적인 투구폼을 담아내기도 했었다.
많은 팬들은 롯데가 최동원을 초청해서 시구를 했으니 서로의 관계가 좋아진게 아닌가 하는 희망적인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사실은 롯데가 초청한게 아니라 2009년 프로야구 타이틀 스폰서인 CJ마구마구에서 전설적인 선수를 초청해 시구 행사를 벌이는 '레전드 시리즈(legend series)' 이벤트였다고 한다.
사직구장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구장면.
당시 사직구장에서 틀어줬던 영상.
참고로, 그때 구장에서 최동원의 시구를 본 관중 가운데 롯데 올드팬들은 위에 적혀 있듯 21년만에 최동원이 롯데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로 올라오자 눈물까지 흘렸다. 그만큼 최동원이 롯데 팬들에게 있어서 큰 존재이다. 게다가 이 날은 경남고 후배 송승준이 당대최강이었던 SK를 상대로 완봉승을 거둠으로서 경기의 의미가 한층 더 커졌다
MBC ESPN '날려라 홈런왕'에서 유소년 야구 감독직을 맡고 있다. 웃기도 많이 웃고 의외로 웃기기도 하신다. 최근 방영분에선 카라의 깜짝방문에 차명주 코치와 함께 좋아서 입이 찢어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셨다(...). 미래, 야구계에 '최동원의 아이들'이 출현하길 기대해본다.
한 때 인터넷 상에 간암으로 인해 투병 중이라는 카더라가 돌았으나 사실무근으로 판명되었다. 자기는 등산 열심히 하고 내려왔는데 무슨 이야기냐며 당황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본인이 극구부인하니 정말 건강하게 잘 지내시는 듯 했으나...
2011년 7월 22일 경남고와 군산상고 레전드 리매치에서 심하게 야윈 모습으로 나와 충격을 주었다. 일단 인터뷰에서는 건강에 이상이 없고, 체중이 많이 불어 식이요법을 통한 다이어트를 하다가 너무 심하게 살을 뺀 것이라며 와병설을 부인하기는 했지만 많은 팬들은 그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고...
결국 그날 마운드에는 오르지 못하고 계속 벤치에 앉아 있었다. 한 타석이라도 서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지만, 본인은 너무 야인 생활을 오래해서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어중간하게 서는 것은 싫다고, 솔직히 말한다면 허리를 삐끗해서 올라가지 못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거슨 나중에 전부 거짓말임이 밝혀졌고...
?height=600 결국 이것이 최동원 생전에 마지막으로 입은 유니폼이 되고 말았다...[40]
해당 인터뷰
이 레전드 리매치가 있기 전 박촉새박동희가 김성한과 함께 긴 시간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가 길어서 최동원 파트만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초등학교 때까진 축구부에서 뛰다가 축구에 대한 흥미를 잃고 어머니가 마침 야구부가 있는 학교로 전근을 가 따라가 야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연세대 출신들의 정치 공작으로 최동원이 어쩔 수 없이 고려대가 아닌 연세대로 갔다는 사실을 최초로 밝혔다.
83년 데뷔 시즌을 9승 16패로 부진한 성적으로 마감한 후, 하루 400개를 던져가며 훈련한 끝에 페이스를 끌어 올렸다고 한다. 하지만 인터뷰에서 그는 후배들에게는 이렇게 무식하게 훈련하지 말고 '가늘고 길게 선수생활을 해라'고 할거라고...그래도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굵고 짧게 선수 생활을 할 것 같단다. 그게 자신의 인생이기 때문에.
지금 84년 한국시리즈로 돌아가 그 때처럼 등판하라고 한다면 답을 유보할 거란 말을 했다. 최후가 그런 것(트레이드)인줄 알았다면 그렇게 던지진 않았을 것이다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그 밖에도 심금을 울리는 그의 말들이 많다. 최동원을 동경하는 팬이라면 한번쯤 꼭 읽어보길.
최동원은 레전드 매치 당시 와병설을 부인했던 것과 달리 실은 2010년부터 지병인 대장암이 재발해 경기도 포천 등에서 요양 중이었다. 그러던 중 병세가 급속도로 악화되어 일산의 병원으로 옮겼지만 병을 이기지 못하고 2011년9월 14일 새벽 2시 2분 향년 53세로 끝내 숨을 거두었다.# 공교롭게도 장효조 감독이 숨을 거둔 직후인 1주일 전부터 병세가 악화되었다고.[41] 사실 레전드 매치 당시 괜찮다고 한 인터뷰 기사도 기자에게 아프다는 말을 절대 쓰지 말라고 간곡하게 부탁해서 쓴 거짓이었다는 것이 뒤늦게 알려졌다.# 팬들에게 자신의 병세가 알려지는 것을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본인의 마지막 소원은 고향팀에서 감독을 하는 것이었지만, 결국 친정팀 롯데와의 화해는 살아서 이루어지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일했던 한화 이글스에서도 비록 프랜차이즈 스타는 아니지만 4년간 코치로 연을 맺었던 점을 고려하여 한화그룹 임직원이 상을 당한 경우에 준해서 지원을 해주겠다고 했지만 롯데 자이언츠 구단에서는 기일 오후까지 별다른 대응이 없어 폭풍같이 까였다. 성적만 잘 나가면 다냐? 롯데 구단에서 명예감독 임명, 최동원 데이 명명을 검토하겠다고 한 것이 전부였다. 이미 한화에서 빈소까지 차린데 비해 롯데는 고작 이 정도냐며 폭풍같이 까였다.
결국 롯데는 팬들의 여론을 의식한 듯, 앞서 언급했듯 최동원을 명예감독으로 추진하는 것을 검토하겠다고 밝혔으며,관련기사영구결번과 9월 30일을 최동원 데이로 지정[42]하겠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15일 조문에서 밝혀 극적 화해의 마지막 실마리는 남겨두고 있다. 검토드립 돋네
먼저 세상을 떠난 장효조 선수와 여러 모로 묘한 우연의 일치가 있다. 최동원은 롯데에서 데뷔했지만 위의 트레이드로 인해 삼성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해야 했고 장효조는 같은 시기 삼성에서 롯데로 트레이드되어 롯데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 전설이 일주일 간격으로 작고한 2011년 시즌 페넌트레이스 1, 2위는 경상도 지역 연고의 삼성과 롯데. 만약 두 팀이 한국시리즈에서 붙게 된다면 여러가지의 관점에서 많은 의미가 부여될 한국시리즈가 될 것이다.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공을 던지고 싶다.라고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의식불명 상태에서도 운명하는 순간까지 야구공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까지 쥐고 있던 공은 그의 501, 502탈삼진 기념구[43]. 진정 뼛속까지 야구인이자 전설로 남을 투수.
그가 마지막으로 공식석상에 나왔던 2011년 7월의 인터뷰에서, "별은 하늘에만 떠있는다고 별이 아니에요. 누군가에게 길을 밝혀주고, 꿈이 돼줘야 그게 진짜 별이에요. 그래서 생각한 건데, 이제 야구계를 위해 나도 뭔가를 하려고 해요. 이젠 그냥 '최동원'이란 이름 석 자가 빛나는 별이 아니라, 젊었을 때 나처럼 별을 쫓는 사람들에게 길을 밝혀주는, 그런 별이 되고 싶어요. 야구가 뭐냐고요? (금테 안경을 고쳐 쓰며) '최.동.원' 이름 석 자지. 야구가 전부였지…."라는 말을 남겼다.
이날 유족과 롯데 구단 관계자, 동료 및 선후배 야구인 등 약 100여명이 모여 최동원의 마지막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장효조의 발인 때와 마찬가지로 전혀 쓸쓸하지 않은 발인이었다. 최동원의 영정이 영구차에 실리자 롯데 시절 동료였던 양상문 해설위원과 1988년 트레이드 당시 같이 삼성으로 갔던 후배 김성현 인창고 코치는 참았던 눈물을 흘리며 고인의 영면을 기원하였다. 최동원의 시신은 벽제 화장장에서 생전에 그가 아끼던 글러브와 유니폼과 함께 화장되어 한줌 재가 되었고, 경기도 파주의 청아추모공원에서 영원한 안식을 갖게 되었다...
최동원의 부고 소식을 접한 많은 팬들이 십시일반하여 조화를 보내고 장례식장에 직접 조문을 가기도 하였다. 롯데 자이언츠 갤러리에서는 250만원을 걷어 조화와 부조금을 유족 측에 전달했고 한화 이글스 갤러리[44]와 "롯데사랑 거인사랑"에서도 조화를 보내어 고인을 추모했다. 아버지가 팬이었다는 10대 소녀가 장례식장을 찾아가 조문하기도 했고, 심지어는 춘천에서 한달음에 달려온 팬도 있었고, 수산시장에서 장사를 하다가 온 차림의 팬도 있었다. 최동원이라는 존재가 팬, 특히 롯데팬들에게 얼마나 큰 존재였는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45]
최동원이 세상을 떠나고 얼마 후, 2011년 현재 한국프로야구에서 뛰고 있는 외국인 투수 세 명, 레다메스 리즈와 벤자민 주키치, 브라이언 고든에게 최동원의 1984년 한국시리즈 7차전 때 투구 동영상을 보여주며 그를 평가해 달라고 했는데[46] 세 명 모두 엄지를 추켜세우며 감탄했다.
레다메스 리즈 : "(옆에 있던 임찬규의)영웅이 될 만한 투수이다. 커브와 역회전공 모두 평가가 어려울 정도로 대단하다. 저렇게 온 몸을 사용하는 큰 투구폼으로 제구가 되는 투구 메커니즘은 처음 봤다. 임찬규가 저런 우상을 잃었다니, 참으로 안타깝다."
벤자민 주키치 : "역회전공 하나만 봐도 대단한 파워 피쳐였다는 걸 알 수 있다. 한국시리즈 최종전같은 중요한 경기에서 저렇게 자신 있게 몸 쪽 공을 던질 수 있다는 건 평소 몸 쪽 공에 대한 자신감이 있다는 뜻이다. 나는 이렇게 공격적인 투수를 좋아한다. 위기의 순간에 이런 공을 던질 수 있는 투수는 거의 없을 것이다. 커브도 저렇게 각이 큰 커브는 오랫만에 본다. 특히 저런 투구폼에서 나오는 커브는 처음 봤다. 역회전공과 커브를 던질 때 타점도 약간 다른 것 같은데 정말 특이하다. 내 투구 폼보다도 훨씬 독특하고, 타자들이 아주 곤란해 했을 것 같다."
브라이언 고든 : "이런 공을 던지려면 아주 강한 마지막 동작이 필요하다. 마지막 동작에서 공을 때리듯(hit) 던져야 저런 역회전이 걸릴 텐데 그 동작이 매우 자연스럽다. 보통 2스트라이크 이후에 몸 쪽 공으로 삼진을 잡기 위해 이런 공을 던지는데 1스트라이크에서 던진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커브도 크게 휘는 좋은 커브지만 역회전공이 더 대단한 것 같다. 이런 커브와 역회전공을 한 사람이 동시에 구사한다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다." 관련기사
2011년 9월 30일, 언론에 보도된 대로 두산 베어스와의 홈경기를 "최동원 데이"로 명명하고 경기 전 최동원 선수의 현역 시절 등번호였던 11번의 영구결번식이 거행 되었다. 이날 최동원 선수의 모친과 아들을 비롯한 유족이 참석하였으며, 최동원 선수의 외아들인 최기호 씨가 시구자로 나섰다. 그리고 이날 경기는 선발 라이언 사도스키가 2회초에 두산 윤석민에게 쓰리런 홈런을 두들겨 맞고 조기강판 하며 흔들렸지만 곧바로 등판한 장원준이 7 ⅓이닝 4피안타(탈삼진 4개, 사사구 1개) 무실점으로 쾌투하였고, 타선에선 강민호와 이인구가 먼저 간 선배를 추모하는 홈런포를 가동하며 롯데가 6-3으로 뜻깊은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부산에서 최동원 기념 야구박물관 출범식이 열렸고 이 자리에는 부산시장을 비롯해 부산시 인사들이 모였다고 한다. 물론, 롯데는 화환 하나 보내고 직원 하나 보낸걸로 끝.#
2013년 들어 사직야구장에 고인의 바람이었던 롯데 감독의 금의환향하고 싶다는 꿈을 추모하기 위해 동상 제작 모금을 했고 #관련기사 2013년 9월 들어 동상이 공개, 정식 제막식은 9월 14일에 열렸다.#관련기사
2013년 12월 24일부터 2014년 3월 2일까지 열려있을 예정인 부산 벡스코 2013 야구체험 스토리에서는 최동원의 유품 전시관이 마련된다. 모친이 찾았으며, 금의환향한 부산 출신 메이저리거 추신수도 12월 31일 이곳을 찾아 사인볼을 남기기도 하였다.
한편, 박동희기자가 쓴 칼럼에 따르면 이만수감독(11년도 당시는 감독대행)이 사망 사흘 전부터 매일 찾아와 문병을 했었다고 한다. 박동희 기자가 이외에도 여러가지 최동원에 관한 일화가 담긴 기사를 시리즈로 썼다. #1#2#3#4
전성기가 약간 지난 시점에서 프로데뷔를 했지만 그가 남긴 족적은 크며, 전성기 때의 선동열과 비교해 우위를 점칠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수일 것이다. 선동렬은 최동원을 라이벌이자 존경하는 선배로 인식하였고 최동원 또한 선동렬을 라이벌이자 인정하고 존중하는 후배로 인식했다고.
이와는 별도로 2011년 9월 25일 KBS 스페셜 무쇠팔 최동원 인생을 던지다 편이 방송되었다.[47][48] 야구팬이라면 무조건 감상하자. 이 방송에 나온 바로는 영화 퍼펙트게임 제작진에게 '내 투구폼이 워낙 와일드하기 때문에 배우가 다칠수도 있다. 꼭 정확하게 따라하지 않아도 된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해당 다큐에서는 마이클 민민훈기, 박촉새박동희, 강병철, 유두열, 김시진, 김일융, 한문연, 송승준 등의 인터뷰도 곁들여져 있다.
이후에도 2011년 11월 11일에[49] MBC 스페셜에서 불멸의 투수 최동원편이 방송되었다.[50] 직후에 만들어졌던 KBS 보다 양이라든가 자료 면에서 풍부하니 팬이라면 보는 것을 추천. 중간에 보면 은퇴 이후에도 팬들이 편지를 보내거나 하면 빠짐없이 답장엽서를 보낸 장면이 나오는데 그곳에 롯데 자이언츠라는 문구가 있다...자신을 그렇게 내팽겨쳤던 구단임에도 불구하고 끝내 롯데 자이언츠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
그라운드에서의 자신만만하고 오만하기까지한 이미지와는 달리 사적으로 만나면 겸손하고 순수했다고 한다. 1990년대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한 모습을 보면 구수한 말투에 주위사람들과 어울리려고 노력하는 태도를 볼 수 있다.
정치적 이유로 각종 데모와 시위가 많던 1980년대, 시위에 참여하는 군중속에 끼어있던 최동원 선수에게 놀란 행인들이 혹시 야구선수 최동원 아니냐고 묻자, "예, 저 최동원 맞심더." 하고 태연하게 시위를 계속하더라는 일화가 있다. 그리고 1980년대 말 노사분규가 극심했던 시기, 부산지역 언론노조에서 총파업을 했을 때 무기명 후원금을 기탁했다고도 한다.(2011년 9월 방영된 KBS 스페셜 참조)
동료 선수들의 기본생계권을 보장하기 위해 선수협을 창단했던 것을 보면 야구실력뿐이 아니라 인간적인 정의감과 소명감도 있던 것으로 보인다. 실력뿐 아니라 인간성도 갖추었던 진정한 1인자.
가장 좋아했던 음식은 모친 김정자 여사가 해주던 김치쌈이라고 한다. 1980년대 모 잡지에서 프로야구 선수들의 여름 보양식에 대해 기사를 쓴 적이 있었는데 다른 선수들은 보약, 장어, 홍삼 등 오만 보양식들의 이름이 쏟아져 나오는데 유독 최동원만 찬 물에 밥 말아서 김치 싸먹으면 그게 보양식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혹시 고기나 보약같은 선물들이 들어오면 다 주변에 누군가 나눠줬고, 특히 1958년 개띠라서 개에 대해 애착을 보였던지라 누군가 개소주를 보내주면 진심으로 화냈다고 한다. 유일하게 보양식으로 먹었던 것이 인삼과 대추를 달인 물.
하지만 정작 본인은 서구화된 식습관으로 유발된다는 대장암으로 세상을 떴으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기자들은 자존심이 강한 최동원이 롯데에서 트레이드된 이후 겪었던 엄청난 스트레스 때문에 아닌가 하는 추측을 했다. 오죽했으면 야구를 그만두고 평생 입에 대 본 적이 없는 술을 마시면서도 주변 사람들 모두 최동원이 술을 마시는 장면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
2012년 9월 11일 사직야구장두산 베어스 vs 롯데 자이언츠전에서 그의 아들인 최기호 군의 시구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피는 못 속이는지 특유의 역동적인 투구폼과 묵직한 구위를 선보이며 팬들을 아련하게 만들었다.[51] 타석에 있었던 이종욱이 놀랐을 정도. 영상
2012년 10월 25일, 매니지먼트 게임인 프로야구매니저는 원년시즌까지의 선수카드를 업데이트 했으며 고인이 활약했던 시즌의 카드를 업데이트했다. 특히 한국시리즈 4승의 역투로 기억되는 1984년 카드는 EX카드로 나와 고인을 모르는 어린 야구팬들도 고인의 위대함을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다.
2014년 4월 17일, 한국판 사이 영 상인 최동원 상이 탄생하였다.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조.
2015년 2월 5일, 불법 소금물 관장 시술을 하던 목사 부부가 체포되었는데 이들이 진행한 9박 10일 캠프에 암 투병 중이던 최동원도 참가한 사실이 확인되었다.[52]
2015년 3월 28일, 최동원 모친 김정자 여사가 2015 한국 프로야구kt 위즈와 롯데 자이언츠의 개막전 경기에 앞서 시구를 했다. 최동원의 현역시절 투구폼을 그대로 재현한다고 해서 많은 롯데팬들의 기대를 받았는데, 아니나다를까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비슷하게 투구폼을 소화해냈다. 투구폼 뿐만 아니라 생전 공을 던지기전에 버릇[53]까지 똑같이 보여주면서 뭇 야구팬들의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미국에서 그의 후계자가 오는데...
통산 기록은 8시즌(248게임, 1414.2이닝)동안 103승 74패 26세이브, 평균자책점 2.46 , WHIP 1.15, 1019탈삼진을 기록. 커리어하이는 1984년 시즌으로 27승(!)[54] 13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2.40, WHIP 1.04, 223탈삼진[55]을 기록했다.
특이한 기록은 1984년 8월 16일 MBC 청룡을 상대로 '4번 타자'로서 1사 만루 상황에 2타점 적시 2루타를 때린 기록이 있다. 4번타자 1루수였던 김용철이 자신이 친 타구에 부상을 당하여 물러나자, 지명타자였던 김민호가 1루수로 들어오면서 김용철의 타순에 투수였던 최동원이 들어가야 했던 것이다. 이것은 그대로 결승타가 되었으며, 유일한 프로에서의 타격 기록이다. 따라서 그는 타율이 10할, OPS가 3.000이다(...).[56]
[1] 1988년의 트레이드로 11번과 29번은 유니폼을 서로 바꿔입게 된다.....[2]1984년 한국시리즈 직전, 1·3·5·7차전 등판을 지시받았을 때[3] 실업팀 롯데 자이언"트"가 공식표기.[4] 실업야구 코리아시리즈에서 6경기에서 6경기에 등판(선발로 세 번)하여 무려 42.1이닝을 던졌다![5] 최동원 선친은 본래 소싯적에 축구에 재능이 있었으나 집안의 반대로 인해 꿈을 접어야 했고, 그 후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다리를 잃은 아픈 기억을 안은 사람이었다. 그 때문인지 아들의 재능을 발견한 뒤로는 누구보다도 강력하게 아들의 성장을 위해 헌신했었고, 구설수에 휘말린다 싶으면 "모든 욕은 내가 먹겠다"고 하며 아들을 감쌌다.[6] 이후 인터뷰에 보면 정말 대단한 자신감을 가졌다는 것이 보이는데 홈런을 맞으면 다음 상대 때 다시 똑같은 코스에 던져서 "칠테면 쳐봐라. 이번에도 또 치면 넌 실력이었고 못 치면 운이 좋아서 네가 쳤을 뿐이다."라는 마인드를 가졌었던 게 나온다.[7]메이저리그 스카우트가 한국에서 그의 볼스피드를 측정했을 때 최고구속 155km/h의 속구를 던졌다는 설이 있다. 물론 프로에 와서는 그때의 구속을 회복하지 못해서, 최동원의 전성기는 연세대 시절이라는 말에 설득력이 느껴진다.참고로 본인이 던졌던 공중에 가장 빨랐던 공이 세계선수권 시절에 157km/h라고한다.[8] 피안타, 피홈런, 볼넷[9] 참고로 투심과 슬라이더의 영상은 지칠대로 지쳐있던 한국시리즈 7차전 영상이다. 그래서 그런지 투구폼이 상당히 무너져있는것을 볼수있다.[10] 흔히 슈트라고 부르는데 슈트는 구질이 아니라 구종을 말한다. 싱커나 포크볼 등이 슈트성 공에 포함된다.[11] 선배들은 박철순을 지명하여 구타를 지시한다. 박철순이 단독으로 혹은 주도적으로 구타한 것은 아님.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인터뷰를 참조.[12] 당시 최동원은 1977년 니카라과에서 열린 야구 슈퍼 월드컵 우승으로 혜택을 받았다.[13] 이후 아마가 아니라 프로에서 뛰는 것도 허용으로 바뀐다.[14] 올스타 선정시 해당 연도 2만 5천달러, 사이영상 수상시 해당연도 2만 5천달러[15] 메이저리그에는 이런 말이 있다. "평균 이상의 구속과 뛰어난 제구력, 그리고 명품 커브를 갖춘 투수는 두 자리 승수를 보증한다." 하지만 이런 강속구와 커브 위주의 정통파 올드스쿨 피쳐는 메이저리그에서도 박찬호가 마지막이다. 그 박찬호마저도 슬럼프를 극복한 후엔 변화구로 슬라이더를 주로 던졌다.[16] 최동원의 인터뷰에서는 5,000만원이었는데 2,100만원은 현금지급이었고, 2,900만원은 6개월 어음이었다고한다.이게 무슨 개소리야? 최동원은 이 말도 안 되는 계약을 믿었으나, 롯데는 그 어음을 그가 사망할 때까지 결제해 주지 않았다.그리고 최동원은 프로구단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하면서 "다시는 속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그와 롯데와의 인연은 시작부터 악연이었다.[17] 한국시리즈의 실업야구 버전[18] 이미 1회에 롯데가 5실점한 상황이라 패전이 아님[19] 참고로 현재 야구 규칙으로는 한 투수가 동일한 경기에 승리와 세이브를 동시에 채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KBO 규칙 10.20조에는 세이브 투수의 요건으로 '승리 기록을 얻지 못한 투수'라고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투수는 승리 혹은 세이브 두 기록 중 하나만 가질 수 있다.[20] 연봉에 관해서는 연봉 관련 항목을 참조[21] 실제 1985년 삼성이 이렇게 통합우승을 하였다. 결국 1986년부터 전,후기리그 1,2위팀에게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주고 진출권 2장이면 한국시리즈 직행하는 제도로 바뀌고, 1989년부터는 단일리그제로 바뀌면서 준플레이오프가 도입된다.[22] 객관적인 전력상 최동원 빼면 롯데는 삼성보다 한수 아래라는 평가가 많았다. 게다가 최동원조차 고의패배 경기를 제외하면 84년 삼성전 전적은 2승 4패 3세이브로 썩 좋지 않았다. 즉 김영덕 감독은 7전제 한국시리즈에서 최동원이 기껏해야 선발로 2경기 나올 걸로 보고 나머지 경기를 모두 이기면 된다고 계산한듯 싶다.[23] 당시 롯데는 마지막 2경기를 모두 이겨야 1위가 되는 상황에서 김영덕 감독의 배려를 사전에 감지하고(?) 노골적으로 2군과 후보 선수들을 기용해서 주전을 쉬게하면서 무난하게 2연승을 한다.그리고 이게 전국에 TV생중계 되면서 일파만파...[24] 김영덕 감독은 지금까지도 '이기기 위해선 무슨 짓이든 한다' 란 감독의 대명사로 불려진다. 최근 몇년간은 김성근 감독도 그런 욕을 먹지만 이 사람에 비하면 애들 장난 수준이다. 김성근 감독은 자기 팀의 전력을 최대한으로 쥐어짜서 승리하려고는 할 지언정 고의적인 져주기 게임 따위는 하지 않는다.[25] 당시 롯데의 선발투수진은 그야말로 최동원외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할만큼 비참 그 자체였다. 더구나 만년 하위 단골에서 첫 한국시리즈 진출이라는 쾌거를 낳은 이상 우승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던 롯데로서는 어쩔 수 없는 대책이기도 했고...[26] KBO 최초의 한국시리즈 완봉승이다.[27] 전날 그는 6피안타 무사사구 완투패를 하고 또 올라왔다. ㅎㄷㄷ[28] 성적대로 하자면 최초의 타격삼관왕인 이만수가 정규시즌 MVP를 받고, 최동원이 한국시리즈 MVP를 받는 것이 맞다. 그러나 기네스북까지 오른 아홉 타석 연속 고의사구로 홍문종을 걸러내면서 '비난은 잠시지만 기록은 영원하다'라는 어그로를 잔뜩 끈 김영덕 감독 때문에 기자진들이 외면한 이만수는 정규시즌 MVP를 놓쳤다.[29] 참고로 일본프로야구에서는 1958년 니시테츠 라이온즈의 이나오 가즈히사와 1959년 난카이 호크스의 스기우라 타다시가 일본시리즈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상대로 시리즈 4승을 기록한 적이 있다.[30] 실제로 2011년 9월 25일 방영된 KBS 스페셜 무쇠팔 최동원 인생을 던지다 편에서 당시의 인터뷰를 볼 수 있다.[31] 하지만 1984년의 엄청난 혹사에도 1985년에는 20승을 달성하고, 1986, 1987년까지 꾸준히 두자리수 승수를 올리는 등 괴물같은 활약은 지속되었다. 선동열과 그 유명한 15회 완투 대결도 바로 1987년에 나온 것. 정말 이쯤되면 사람의 레벨이 아닌 것 같다 밑에서도 후술하겠지만 최동원이 비교적 이른 은퇴를 한 것은 혹사로 인한 후유증도 후유증이지만 그보다는 선수협 창설 시도로 인해 구단에게 찍혀서 삼성으로 버림받은트레이드를 당한 충격과 그로인해 야구에 대한 동기부여와 의욕상실이 가장 컸다.[32] 정확히는 마지막이 배신(강제 트레이드)당하는 것임을 알았더라면 아마 그 자리에서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을 것이라고 말했다.[33] 여담으로 이순철은 의자를 젖히고 자고 있어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34] 1981년도 실업팀 롯데에 입단하기로 하면서 약속한 2900만원을 주지 않은 것을 말한다.[35] 83년 롯데의 팀 타율, 팀 출루율이 리그 꼴찌였으며, 리그 최다실책팀임을 감안하고 최동원이 선발로 나온 21경기 중 16경기를 완투하여 완투승 8번, 완투패 8번을 기록한 것을 감안하면 2014년 현재 프로야구계의 일반적인 시각에서는 당연히 연봉이 상승되었어야 할 것이다. 다만, 당시 시대상 투수의 클래식 스탯인 승-패. 평균자책점 등에 비중이 컸던 것도 고려하고 넘어가야 한다.[36] 당시 고교 선배였던 김영삼이 여당인 민주자유당으로 출마할 것을 권유했지만, 이를 당당히 거절하고 이기택과 노무현이 있었던 꼬마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한 것이 컸다.[37] 방송사의 어떤 프로그램에 박경림과 같이 출연했었는데 최동원의 현역시절 모습이 자료화면으로 나오자 박경림은 해설자로만 알았지 실제 한국 프로야구 선수로 뛰었는줄은 몰랐다면서 놀라해 하는 모습이 나온적 있었다.[38]김인식 감독이 WBC 대표팀을 이끌고 경기를 치르던 도중에 국제전화 걸어서 "감독님, 물건 하나 왔습니다"라고 말하였고, 이후 시범경기에서의 부진으로 개막 로스터에 오르지 못한 류현진을 다시금 강력하게 추천하여 로스터에 포함되도록 힘썼다. 최동원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류현진은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39] 하지만 후에 작고한 뒤에 양상문 말에 따르면 선수시절에는 최동원이 이것저것 잘챙겨줬으며 장례식장에도 양상문이 두번이나 참가한 것 등을 볼 때 그와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다만 롯데와의 관계가...[40] 수척한 얼굴에 비해 배가 나와있던 것은 대장암 말기로 인해 복수가 차있던 것이었다. 고교 선배인 허구연이 이를 눈치채고 괜찮은 거냐고 묻자 최동원은 모른 척 해달라고 부탁했다고...병원에서는 절대 나갈 수 없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건강이 악화된 상태에서 레전드 매치에 나온 것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라운드에서의 추억을 되새기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유족들은 말하고 있다.[41] 그러나 최동원의 병세가 악화될까 장효조의 부고는 알리지 않았다. 불세출의 스타들끼리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통했던 듯...[42] 이 날은 1984년 최동원 선수가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완봉승을 거둔 날이기도 하다.[43]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쥐고 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손에 잡힌 것을 들고 있었다고 한다.[44] 다소 의외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데뷔시즌 시범경기에서 죽쒔던 류현진이 붙박이 선발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당시 한화 이글스의 투수코치였던 최동원이 류현진은 무조건 선발로 써야 한다고 강하게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최동원이 아니었다면 류현진 또한 비슷한 시기에 지명되어 노예로 굴려지다가 망가진 다른 유망주들과 같은 운명을 맞았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칰갤에서 조화를 보내는 것은 전혀 이상하거나 의외인 일이 아니다. 아니,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45] 일설에서는 롯데 팬의 절반은 최동원이 만들어 준거라고 할 정도다.[46] 선입견이 없도록 최동원이 어떤 선수였는지 사전 설명 없이 동영상을 보여줬다고 한다. 다만 레다메스 리즈는 동료인 임찬규에게 "이 분이 나의 영웅이었다"라고 살짝 귀띔받았다고.[47] 자세히 보면, 처음 최동원의 투구 자세를 재연하는 장면에서 공을 던졌는데 글러브 안에 공이 있다거나 우완투수였던 재연배우가 좌완으로 바뀌어있는 등(이 경우는 재다른 영상일 가능성도 있다.) 눈에 거슬리는 장면이 있다.[48] 마지막 최동원의 대사. "승부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라운드에 들어와서 야구복을 입고 자기의 모든 것을 즐거워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게임한다 그러면 그보다 더 보람된 것이 없을 것 같아요. 저는 그것을 여러분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습니다."[49] 정확히는 2011년 11월 11일 밤 11시에 MBC는 11번 채널이다. 등번호 11번의 최동원을 기념하기 위한 너무나도 완벽한 숫자의 조합.[50] 그러나 그시간에 부산MBC에서는 자체방송을 하였다.헐[51] 야구를 배우긴 했지만, 너무 늦게 시작한 탓인지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그만뒀다고 한다. 이후로는 스포츠 경영학을 공부하고 있는 중. #[52] 최동원이 불법 시술에 동조한 것이 아니라, 암 투병 중인 상태에서 시술을 받기 위해 캠프에 참여한 것. 참고로 캠프에 참여하면 9박 10일동안 매일같이 소금물 관장만 한다.[53] 투구 전 송진가루, 신발끈, 겉양말, 안경, 모자챙을 차례로 만지고 공을 던지는 버릇[54] 1983년 장명부의 30승 다음으로 한국프로야구 단일시즌 최다승 2위 기록이다.[55] 이는 2013년 현재까지 단일시즌 최다 탈삼진 기록이다.[56] 출루율 1.000 + 장타율 2.000[57] 한국 프로야구 단일시즌 탈삼진 1위[58] 윤학길의 100완투에 가려져 있지만 한국 프로야구 통산 완투 2위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