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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환
끄트머리 사무실
2014. 11. 18.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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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환
이름 | 안정환 (安貞桓 / Ahn Jung-hwan) |
생년월일 | 1976년 1월 27일 |
국적 | 대한민국 |
출신지 | 경기도 파주시 |
포지션 | 공격형 미드필더 섀도 스트라이커[1] |
신장 | 178cm |
혈액형 | AB형 |
가족 | 아내, 슬하 1남 1녀[2] |
등번호 | 19번[3][4] |
프로입단 | 1998년 부산 대우 로얄즈 |
소속팀 | 부산 대우 로얄즈 (1998~2000), 71경기 34골 AC 페루자 (2000~2002), 30경기 5골 시미즈 S펄스 (2002~2003), 38경기 14골 요코하마 F. 마리노스 (2004~2006), 34경기 16골 FC 메스 (2005~2006), 16경기 2골 MSV 뒤스부르크 (2006~2006), 12경기 2골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07~2007) 부산 아이파크(2008~2008), 26경기 6골 다롄 스더 (2009~2012), 32경기 8골 |
국가대표 | 1997~2010, 70경기 17골 |
1999년 K리그 MVP | |||||
고종수(수원 삼성 블루윙즈) | → | 안정환(부산 대우 로얄즈) | → | 최용수(안양 LG 치타스) |
- 상위항목 : 축구 관련 인물
1. 개요 ¶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이자 한국을 대표했던 축구선수
대한민국의 처음이자 아마도 마지막 판타지스타, 가장 화려하지만 동시에 가장 불운한 축구선수.[5] 수려하고 잘생긴 외모와 뛰어난 볼컨트롤과 드리블, 중앙에서 좌우로 열어주는 정확한 패스, 반박자 빠르고 정확한 슈팅으로 데뷔 때 부터 뛰어난 활약을 선보이며, 수많은 여성팬들을 몰고 다녔다.
FIFA 월드컵에서 3골을 넣어 아시아 최다 득점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본선 1차전에서 박지성이 한 골을 추가하면서 이 기록을 공동 보유하고 있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 축구계에서 평생 까임방지권을 획득했다고 여겨지는 몇 안 되는 선수가 되었다. 더불어 대한민국 최초의 전 대륙 상대 득점자.
2. 플레이 스타일 ¶
양발이 완벽하게 자유로운 몇 안되는 선수이며,[6] 플레이 스타일은 전형적인 트레콰르티스타이고 플레이 특성상 공격형 미드필더나 섀도우 스트라이커의 포지션에서 좋은 활약을 보인다. 그러나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을 거치며 많은 이들에게 원톱형 스트라이커로 이미지가 고정되었다. 특히 2002년 월드컵 때는 공격진에 사람이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정상급 팀의 수비 앞에서 공격을 잘 이끌어나가는 등 절정의 경기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공 소유가 많이 필요한 탓에 팀컬러를 맞추기 어렵기도 하고 안되는 날은 공을 오래 끌면서 곱게 종이를 접다 팀 전체를 나락에 떨구는 등 단점도 있다.[7] 그렇게 대단한 피지컬 조건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네덜란드의 전설적인 선수 요한 크루이프의 기술인 크루이프 턴을 자신에게 맞게 변형시킨 안느턴이 유명한 개인기이며[8] 골을 넣은 후 결혼 반지가 있는 위치에 키스[9]하는 세레모니가 유명하다. 국가대표팀에서 극적인 골을 많이 넣고,[10] 투입 직후 경기 흐름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아[11] 대표팀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했던 선수였고 명실상부한 2002년 월드컵 에이스였다.
드리블 뿐만 아니라 슛도 강하고 좋았다. 유효슈팅 비중이 높았고 대부분 낮고 강하게 깔렸다. 틈만 나면 박스 밖에서도 중거리슛을 자주 때렸고, 특히 측면에서 중앙으로 치고 들어오다가 아크 근처에서의 때리는 비중이 높았다. 2000년 한일전 원정에서 넣은 중거리 선제골, 2002년 스코틀랜드전에서 그의 첫골이나 2006년 월드컵 토고전에서 중거리슛 역전골[12]등이 그 예이다. 특이사항으로는 데드볼 상태에서도 슛을 감아찬 경우가 적고 회전이 없는 슛을 선호했다는 것 정도를 들 수 있다.
원래 헤딩을 기피하던 스타일이였지만 이탈리아 진출 후 헤딩 기술과 과감함이 많이 늘었다. 페루자 시절부터 헤딩골도 자주 넣기 시작했고 2004년 오만과의 친선전에서는 다이빙 헤딩 골까지 선보였을 정도로 진화했다. 하지만 물론 대부분의 팬들에게는 2002년 월드컵 미국전 헤딩 동점골과 아마 한국축구 역사상 가장 중요한 골인 이탈리아전 연장전 역전 헤딩 골든골이 가장 기억에 남을 듯 하다.
그리고 곱상한 외모와는 달리 튼튼하고 강력하다 못해 거친 멘탈을 가지고 있으며 승부욕도 아주 강하다. 2002 월드컵 3-4위전 터키전이 끝나고 다른 선수들은 모두 터키선수들과 같이 어울려서 관중들께 인사하고 세리머니하고 있을때 혼자 라커룸으로 들어가서 패배의 아쉬움에 씩씩댔다고 한다. 중국에 진출해서도 곱상한 얼굴을 보고 텃세를 부리겠다고 중국 수비수들이 거칠게 태클을 하거나 트래쉬 토크를 하자 문자 그대로 밟아(...)버렸으며 퇴장돼서 나가면서 벤치의 옆유리를 걷어차서 박살내버렸다. 그 이후로 중국수비수들은 물론 팀원들도 대하는게 달라졌다고...
3. 눈물겨운 유년시절 ¶
수려한 귀공자 외모와는 다르게 청소년 대표팀에 뽑혔을 때 오렌지를 처음 먹어 봤을 정도로 안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일단 잘 알려진대로 안정환은 유복자로 태어난데다가, 어머니가 소송방지바람급의 막장[13]이어서 어린 시절을 외할머니와 단 둘이 살아야했다. 그가 직접 승승장구에 나와서 이야기한 유년시절은 그야 말로 눈물겨웠다.
흑석동 판자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안정환은 배가 고파서 무랑 배추서리를 하지않나, 굿판을 돌아다니면서 음식을 얻어먹고, 옷이 없어서 남의 집 빨래훔치기는 기본에다가, 산에 흩뿌려진 삐라를 주워서 미군부대에 신고하여 학용품을 마련하고, 방생기간에 방생되는 물고기를 잡아서 다시 되팔아 돈을 마련하고, 차비가 부족해 버스타고 가야될 학교를 걸어서 가고 차비가 역시 아까워 학교 체육창고에서 잠을 해결하기도 했다고... 오죽했으면 하루는 안정환이 할머니에게 100원만 달라고 했댄다. 왜 그러냐고 할머니가 물었더니, 나가서 아버지를 사오겠다고...실제로 차두리의 아버지가 차붐이었다는것을 매우 부러워했다고 한다.
안정환의 할머니는 축구를 하는 것을 처음에는 반대했다고 하는데, 왜냐하면 가뜩이나 잘 못먹는 애라서, 운동을 하면 배가 더 빨리 꺼진다고 해서였다고 한다.[14] 그래도 안정환은 빵과 우유가 먹고 싶어서, 단순히 또래애들보다 달리기가 조금 빨랐을 뿐인 어린 안정환은 그렇게 축구부로 들어가게 된다. 그렇게 어렵게, 굶주린 배를 잡고 시작했던 초등학교 축구부는 후원하던 선배(선배 아버지의 후원)가 졸업을 하면서 지원이 끊겨서 축구부는 폐지 수순을 밟게 되고, 그 해 마지막 경기에 활약을 보인 안정환을 다른 학교에서 유일하게 스카웃했다고 한다. 나머지 애들은 축구를 관뒀다고...아마 이 스카웃이 없었다면 2002년 월드컵의 성적은..? 상상도 하기 싫다! 그렇게 중학교, 고등학교[15][16]를 거치면서 축구를 하지만 선배들의 상습적인 구타와 매일같이 피곤한 몸에 여전히 배곯는 고달픈 생활들이 이어지고[17] 그렇게 밥먹듯이 축구부를 이탈하고 복귀하기를 반복한다. 본인이 말하길 이 시기에 축구가 즐거워서 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그렇게 아주대학교에 진학한 안정환은 졸업해서 거액에 프로 축구단에 입단하는 대학교 선배들을 보고, 2학년 때 축구로 성공하겠다는 마음을 잡았다고 한다. 1997년 이탈리아 유니버시아드 직후 돌아오자마자 1대2로 지던 팀을 혼자 2골 1어시스트하면서 5대2로 역전승한 일화는 유명. 그렇게 아주대학교의 재단인 대우그룹이 운영하는 부산 대우 로얄즈로 자연스럽게 입단하게 된다.
4.1. 부산 대우 로얄즈 ¶
풋풋했던 미소년 시절
1998년에 프로에 데뷔하자마자 고종수, 이동국과 함께 트로이카로 불리며 K리그의 중흥을 이끌었다. 트로이카 중에서도 가장 수려한 외모로 테리우스라는 별명을 갖게 됐으며 1999년에는 14골을 기록하며 전무후무한 샤샤의 신의 손 사건 때문에 비우승팀 MVP를 획득하고 K리그에서 활약을 발판으로 이탈리아 세리에 A의 AC 페루자로 임대되었다. 첨언하자면 100% 실력만으로 진출한 것은 아니었다. 축빠로 유명한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은 IMF 크리가 터진 와중에도 안정환 해외진출을 밀어주기 위해서 스폰서쉽 계약을 체결해줬다. 바로 1년전엔 서정원을 프랑스 리그로 보내주기도 했다.
4.2. AC 페루자 ¶
불확실한 임대선수 신분과 이뭐병스러운 구단 사정 때문에 경기에 나선 적은 많지 않지만, 출전시간대비 득점률은 안드리 셰브첸코에 이어 2위를 달릴 정도였으며, 올드 축구 팬들에게는 리즈시절로 종종 회자되는 00/01 시즌 대 유벤투스 FC전에서는 당시 전담마킹하던 몬테로를 구토하게 만드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쳐 양 팀 통틀어 최고 평점을 받기도 했다.[19] 당시 그의 성을 이탈리아식으로 읽은 안느(Ahn)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2002 한일월드컵 대표팀에 승선하여 미국전 동점골과 FIFA에서 선정한 8대 골든골에 꼽힌 이탈리아전 골든골을 넣는 등 크게 활약하여 주가가 치솟게 되었으나 바로 그 경기로 인하여 AC 페루자 구단주 아버지의 망언부터 시작해서 이탈리아 내에서 안정환에 대한 여론이 크게 악화된다. 페루자 측은 본래 반짝 값어치가 치솟았을 때 타팀으로 이적시키려고 했지만, 이미 안정환의 마음은 세리에A에서 떠난지 오래였다. 이런 일로 축구팬들 사이에서는 차라리 2002월드컵 때 그 골든골을 안 넣었다면, 안정환의 축구인생이 더 잘 풀렸을거라고 아쉬워하기도 한다. 장사치 구단주의 야비한 언플에 적잖이 마음도 상했고, 안정적이지 못한 팀내 위상도 문제였지만 역시 가장 큰 문제는 이탈리아 환경에 적응 실패. 말도 제대로 안 통하는 동네에서 허구헌날 파스타만 먹다가 질려서 나중엔 아이스크림밖에 먹을 게 없었더라는 일화는 유명하다. 근데 파스타만 먹었던 이유는 당시 페루자에 있었을 때 마르코 마테라치가 문을 박차고 들어와서 마늘냄새난다고 조롱해서라고 한다.[20][21]
이렇게 허공에 붕 뜬 상태가 된 안정환이었지만, 한일월드컵 임팩트가 워낙 굉장했던 탓에 ACF 피오렌티나, 블랙번 로버스 등 많은 빅 리그 팀들의 제의를 받았다. 이때 잉글랜드든 스페인이든 어디든간에 일단은 무작정 이탈리아를 벗어나고자 했던 의사가 강했던 안정환은 주변 축구계 인물들과의 상담과 지지 꼬드김 끝에 계약을 무시하고 과감히 이적을 시도했으나 될 리가 없는 일이라 소송으로 번졌고 당연히 패소하면서 400만 유로의 빚을 지게 된다.
4.3. 시미즈 S펄스 & 요코하마 F. 마리노스 ¶
소송에서 패소하고 빚쟁이가 된 안정환은, 결국 돈의 흐름에 따라 가장 많은 돈을 제시한 J리그의 시미즈 S펄스로 이적한다.[22] 이 당시 일의 대해 안정환은 훗날인 2012년 은퇴 기자회견에서 블랙번 로버스와 계약을 체결했지만, 소유권 문제로 워크퍼밋이 발급되지 않았고, 그 때 체결한 계약서는 아직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이유는 그 때 블랙번으로 이적했다면, 자신의 축구인생이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를 두고 "계약 무시하고 멋대로 행동한 거니 재능이나 축구인생이야 안타깝지만 자업자득이라고만 보기에는 구단주의 병크가 너무 심각했다. 더군다나 이미 현지에 있던 집에 폭도들이 난입해서 물건들을 부수며 난리를 치고 가족살해 협박까지 하는데 누가 페루지아로 돌아가고 싶어했겠는가?"란 측의 의견도 있고."구단주의 병크가 심각한 거야 심각한 거고 그렇다고 의사를 무시하고 블랙번으로 가야될 이유도 없었다. 그냥 "다른 데 가면 될 일이지, 굳이 계약과 관련된 사람들의 모든 의사를 무시하고 본인이 가고 싶은 블랙번을 택한 건 안정환이다. 자업자득성이 맞다."라고 하는 쪽도 있다.
2004년, 요코하마 F. 마리노스로 이적했고, 팀은 전기리그에서 우승을 한 뒤, J리그 챔피언결정전에서 우라와 레즈를 꺾고 2003년 우승에 이어서 2연패를 달성한다. 이 때 안정환은 25경기 출전, 12골을 넣는 준수한 활약을 보이며 요코하마 F. 마리노스의 J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고, 요코하마 F. 마리노스는 안정환이 우승을 이끈 2004년 이후, 현재까지도 우승을 하지 못하고 있다.
4.4. 나이 서른에 다시 유럽 무대로 ¶

자신의 몫으로 남겨진 이적료를 모두 갚은 후 계약이 끝난 2005년 여름에 높은 연봉을 마다하고 프랑스 르샹피오나의 FC 메스로 이적하였으나 안습한 팀 전력으로 인해 큰 활약은 하지 못했다. 이때 메츠의 경기를 보면 9-0-1 포메이션이 뭔지 알 수 있다.
당시 2006년 월드컵을 앞두고 체력적인 문제가 심각했다. 대다수의 전문가들도 안정환은 이제 국가대표에서도 풀타임 못뛴다, 후반기 조커다 등의 운운을 했고 실제 딕 아드보카트 감독도 안정환을 한 방을 노리는 공격수로 썼고, 2010년 월드컵때는 더욱 더 심해져서 허정무 감독이 안정환은 중~후반 20분 정도 남겨놓을때나 쓸 수 있다고 언급할 정도.
2006 FIFA월드컵에서는 토고전에 후반 역전 중거리 슛을 넣는 등 좋은 활약을 펼쳤지만 이후 에이전트사의 미숙한 일처리로 인해 6개월동안 무적신세가 되었고 2007년 K리그로 복귀하여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 입단했다.
4.5. 수원 삼성 블루윙즈 ¶
입단 초기에 대전 시티즌과의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등 부활의 기미가 보였으나, 노쇠한 기미를 드러내며 주춤했다. 2군에서 연습경기를 하던 도중 FC 서울 서포터에게 가족에 대한 인신공격을[23] 당한 후, 경기장을 빠져나와서 항의를 하다가 퇴장을 당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안정환은 벌금 1천만원 징계를 받았다. 일부 언론에서는 안정환을 깠지만, 사정을 다 안 팬들은 그 FC 서울 서포터들을 그야말로 가루가 되도록 깠다고... 그런데 FC 서울의 서포터인 수호신들은 안정환에게 사과를 하지 않았다.[24] 특히, 네티즌에 지목당한 여자 서포터가 수호신의 간부로 활동한 적이 있어 반응이 더 안좋아졌다. 이로 인해 전국의 수많은 안느빠들을 적으로 돌리게 됨은 물론이고, 가뜩이나 연고이전으로 욕을 먹는 FC서울의 서포터인 수호신은 덩달아 전국의 서포터들에게 그야말로 쌍욕을 쳐먹게 되었다. 또한, 수원의 서포터 그랑블루를 포함한 다른 팀의 서포터들도 "북패서포터 주제에 감히 한국축구의 영웅인 안정환을 까다니!"라고 말하며 공공의 적 이미지가 더욱 강화되었다. 이후 수원의 서포터인 그랑블루는 안정환을 위로하기 위해서 신문에 안정환을 응원하는 광고를 냈다. 참고로, SBS 뉴스도 가루가 되도록 까였는데, 안정환이 욕을 하지도 않았는데도 안정환의 항의를 '삐-'처리를 했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안정환은 해당 건을 부인에게는 경기 중의 시비문제로 벌금을 받은 것처럼 이야기했고, 훗날 이 사실을 알게 된 부인은 하루 종일 울었다고 한다.[25] 여담으로, FC 서울의 클럽송을 제작한 바 있는 가수 신해철은 본인이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에서 이 사건을 거론하면서 북패라는 신랄한 표현까지 써가면서 강하게 비판했고, 인연이 있어서 서울을 응원했으나 앞으로는 절대로 응원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었다. 그 정도로 축구계를 넘어 전 사회적으로 파장이 심대했던 사건이었다.
수원에서 기록한 성적은 25경기 5골. 수원이 안정환에게 몸값으로 지불한 액수가 10억 가량으로 추정되는 만큼 기대이하의 성적이었다. 결국 차범근 감독은 안정환과 재계약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마침 2008년 부산 아이파크에 황선홍 감독이 부임하면서 안정환에게 친정팀 복귀를 권유했다.
그런데 여기서도 몸값 때문에 협상이 지지부진했다. 부산은 최대 4억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으나, 안정환 측은 10억을 요구하면서 다시 해외진출설까지 흘러나왔다. 결국 안정환은 6억, 계약기간 1년에 부산으로 이적했다.
4.6. 부산 아이파크로 복귀 ¶
부산에선 경기력이 매우 좋아졌으며 주로 4-2-3-1 포메이션의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로 기용되었다. 이 때 부산의 골 결정력은 안습 그 자체였는데, 안정환이 찔러준 킬패스로 인한 골키퍼 1:1 찬스를 잘 살렸으면 안정환이 08년 K리그 도움왕이 됐을 거라는 우스개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팀 상황이 좋지도 않은데 더럽게 공 끌고 접어댄다는 의견도 있었다. 후반기에 팀 전력 보강이 됐을 때에는 연이은 부상으로 몇 경기 나오지 못했다.
그러나 이 시기 부산은 10년전 리즈로얄즈 왕조 시절의 팀이 아니었다. 계약이 끝난 2009년 안정환과 재계약을 천명했으나 부산이 연봉으로 제시한 2억5천을 거부하면서 수차례 협상이 모두 결렬되었다. 이 액수를 놓고 넷상에서도 말이 많았다. 안정환 네임밸류에 비하면 터무니 없이 낮다는 측과 부산 살림살이에 저정도면 최고 대접이란 측이 팽팽히 맞섰다.[26]
이때 안정환은 좀 미묘한 상태였는데, 수원에서 부산으로 이적할 때는 이적료가 발생했다. 때문에 부산은 안정환을 데려오기 위해 수원에 안영학을 내주는 트레이드를 해야했다. 반면 부산에서는 FA신분을 획득했기 때문에 자칫 부산은 호구다른 팀 좋은 일만 하고 끝날 가능성이 다분했는데...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안정환은 팀을 팀을 이탈하고 중국 슈퍼 리그, 일본 J리그, 중동클럽으로부터 오퍼를 받았으나 안정환은 J리그의 오퍼를 거절하고 중국 다롄스더로 이적한다.
4.7. 다롄 스더 ¶
2009 시즌 다롄에서 3개월 단기 계약으로 활약하다가 계약을 연장하여 2009년도 시즌을 끝낸상태. 2010년 말까지 계약을 연장하게 된다. 활약은 절정의 회춘모드로, 현지에서 별명이 다롄의 왕(大連的王). 09 시즌 단기 계약에는 6골 2도움이라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고 2010 시즌에는 2009시즌 이상의 활약을 펼치며 미드필더로 활약 하면서도 두자리수 골 기록인 10골 4도움을 갱신하며 최고의 플레이를 보여준다. 이런 활약 속에 다롄은 시즌 3위까지 올라가서 아시안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기대해볼만했으나 안정환이 상대 수비의 테클로 무릎에 부상을 입어 이후 경기들을 쉬었는데 다롄이 이후 부진에 빠지면서 결국 리그 6위로 마무리해야했다. 거기다가 리그 최고 용병 1위에 선정되는 포스를 발휘하기도 한다.
2010년, 다롄과의 계약이 만료된 상태로 다롄의 적극적인 구애를 받고 있으며 재계약 K리그 복귀 혹은 스페인 진출을 놓고 고심하다가 결국 다롄과 재계약했다.
무엇보다 안정환 본인이 마음 편히[27] 축구할 수 있다는 점이 작용한 듯 싶다.
2012년 1월 19일, 성남 일화 천마의 유니폼 발표회때 신태용 감독이 2002년의 무직인 국가대표 삼인방(안정환, 김남일, 송종국) 중 한명을 영입하겠다고 말했는데 이 한명이 안정환으로 밝혀졌다. 이 발언 이전에도 안정환 영입과 관련한 물밑접촉이 있었던 듯. 그러나 성남 이적이 좌절된 신태용 감독은 아쉬워하면서, 나랑 밥 먹을 때는 100% 올 것처럼 말하더니 은퇴했다고 투덜거렸었다.
...하지만 1월 26일, 안정환의 에이전트사에서 안정환의 은퇴 결정을 발표하면서 팬들의 기대는 안타까운 마무리를 지었다. 1월 31일 공식적으로 은퇴 기자회견을 펼칠 예정이라고 한다. 한국 축구의 한 역사를 그린 공격수의[28] 여정은 13년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5. 국가대표 활약 ¶
22세에 중국과의 A매치에 국가대표로 선발되며 데뷔전을 치뤘고 1999년 코리아컵 멕시코전에서 첫 A매치 골을 넣었다. 2001년, 거스 히딩크 감독이 부임했을 때 각종 밀고 당기기와 길들이기를 거쳐서 대표팀에 승선했다. 히딩크가 자서전에 언급한 바로는 자존심을 건드리면 반응하는게 꼭 호마리우와 비슷하다고. 또한 히딩크는 당시 안정환을 스타 의식에 젖은 선수로 판단하여 처음에는 일부러 외면했다고 한다.
2002 월드컵 전 스코틀랜드와의 평가전에서 날카로운 중거리 슛과 1대1 상황에서 감각적인 칩샷으로 2득점을 하면서 한국의 4-1 대승을 이끌었다. 이 때, 현역 시절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로 손꼽혔던 사간 토스 윤정환 前 감독과의 콤비플레이는 일명 "투정환 전술"이라고 불리면서 지금도 축구팬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2002년 월드컵 조별리그 폴란드전에서는 후반에 황선홍과 교체되서 들어가서 크루이프 턴으로 수비수를 따돌리며 슛을 하고 두번의 묵직한 슛을 리버풀의 주전 골키퍼인 예지 두덱이 가까스로 막아내는 등 매우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다.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였던 포르투갈전에선 선발로는 처음으로 나와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후반 역습상황에서의 1대1 찬스를 넣지 못했다는게 다소 아쉬웠지만 상관없이 한국은 1-0으로 승리, 16강 진출에 성공한다.
전설이 된 2002 월드컵 16강 이탈리아전에서 골든골 장면. 전반전에 힘들게 얻어낸 페널티 킥을 실축했지만[29], 후반 종료 직전 극적인 골든골을 득점하며 한국의 최초 월드컵 8강 진출을 견인했다.
8강전인 스페인전에서도 선발로 나와서 풀타임+연장전까지 소화했다. 승부차기에서는 네번째 킥커로 나와서 골을 성공시켰다. 16강 전에서 페널티킥을 실축했는데도 불구하고 정중앙을 노려서 넣었는데, 꽤 대단한 담력이라고 할수 있다.
4강전인 독일전에선 후반 교체로 들어가서 독일 수비진을 괴롭혔지만 팀은 안타깝게 패배, 결승진출에 실패한다.
3/4위전이였던 터키전에서는 선발로 나와서 득점까지 했으나 오프사이드 판정으로 인정되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기준이였고 현재 오프사이드 룰 기준이였다면 인정되었을 골이였다![30]경기 내내 중거리슛을 여러번 날리며 공격진들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활약을 보였으나 러스투 골키퍼의 신들린 선방 덕분에 골을 넣는데는 실패하고 팀은 3-2로 패배, 4위로 만족해야 했다.
2003년 5월 한일전 원정에서 결승골을 넣은 후 세레머니를 하는 장면. 한달 전 홈에서 일본에게 1-0으로 패한 한국은 안정환의 이 골에 힘입어 원정에서 1-0으로 이기며 복수에 성공했다.
2004년 아시안컵에서는 조별리그 2차전과 3차전인 UAE와 쿠웨이트 전에서 각각 한골씩 넣었다. 여담으로 안정환이 뛴 아시안컵은 이 대회가 유일했는데, 국대 커리어 내내 여러모의 사정으로 아시안컵과는 그다지 인연이 없었다[31].
2006 월드컵 조별리그 토고와의 경기에서 역전 중거리슛 결승골을 득점하며 첫 원정 월드컵 승리를 이끌었다.
2006 월드컵 조별리그 프랑스전에서는 후반 교체로 나와서 경기 내내 밀리던 팀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히딩크 감독의 평가대로 그야말로 5단 기어 같은 활약. 박지성의 동점골 과정도 사실 중원에서 안정환의 감각적인 원터치 윙패스부터 시작되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23인 로스터에 들어가긴 했으나 나이도 있고 체력적으로 많이 뛰기 힘들었던 까닭에[32] 한경기도 뛰지 못했다.
2월 29일, 한국 대 쿠웨이트 전 하프타임에 은퇴식을 치뤘다. 그리고
6. 은퇴 후 ¶
은퇴 후 아내 이혜원의 사업을 도우면서 프로축구연맹 홍보팀장으로 영입된다. 물론 정식 직원은 아니고 보통 말하는 '홍보대사' 개념인데 그보다 훨씬 더 열심히 뛰겠다고 '홍보팀장' 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후 전국의 K리그 팀 홈구장을 돌며 홍보를 하였고, 2002 월드컵 10주년 기념 K리그 올스타전을 성공적으로 홍보하고 개최하며 이번 시즌 K리그 최고의 영입은 안정환이라는 말까지 나오게 만들었다. 이후로도 K리그를 위해 꾸준히 활동하는중. 대부분의 은퇴한 스타 선수들이 말은 K리그를 사랑하자고 하면서 정작 행동은 보여주지 않았던 반면, 안정환은 정말로 발로 뛰면서 K리그를 위해 일하고 있기에 팬들의 반응이 매우 좋다.
한편, 안정환의 프로축구연맹 홍보팀장 취임 얼마 후 K리그 공식 쇼핑몰이 열렸는데, 거기서 부인 이혜원씨가 하는 화장품도 같이 판다. 과연 홍보팀장
정글의 법칙 히말라야 편에 출연하게 되었는데 이유는 딸이 정글의 법칙을 보다가 '아빠, 나도 물고기 잡아줘.'라고 해서 그랬다고(...). 우리 딸 줄 물고기 잡으러 네팔 갑니다.
2014년 1월 아빠! 어디가? 시즌2에 출연이 확정됨으로서 송종국에 이어서 한일 월드컵의 4강 주역으로서 두 번째 멤버가 되었다.
초반 아들에게는 엄격하고 카메라 앞에서는 쑥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점점 멤버들과 친해지고 촬영이 편해지면서 허당아빠 이미지를 굳히며 예능감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8회에서 아이들 건강검진 받으면서 아빠들도 인바디 체크를 받았는데 과체중 허약형(...)으로 나오면서 과거 테리우스라는 세련된 이미지였던 대중에게 친근한 인간미까지 보여주었다(...). 얼굴값을 못하는 사람
게다가, 아내와 윤민수에게서 '슈퍼 마리오 같다'라는 말까지 들었다.
여담으로 아들 리환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짠한 표정을 종종 짓는데, 카메라가 또 그걸 놓치지 않고 매번 잡아준다.(…) 이 쯤 되면 안정환이라는 아버지의 캐릭터로 잡혀갈 정도.
한옥마을에 갔을 때는 송이버섯을 인질로 잡는(...) 비범한 행동을 보였다.움직이지마! 먹어버리는 수가 있어! 씹으면 소화되!!
7. 해설로 데뷔 ¶
은퇴 이후 MBC의 2014 브라질 월드컵 해설위원으로 활동한다. # 다만, 같은 방송사에서 같이 해설을 담당하는 송종국처럼 지속적인 해설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정식으로 지도자 자격증을 밟는 중이며, 장기적으로도 이 쪽을 생각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아보기 위해 해설을 해보는 것이라 한다.
2014년 5월 28일 대한민국 축구국가대표팀의 출정식을 겸한 한국 대 튀니지 경기에서 선수들의 플레이를 보며 연발한 "늦어요, 늦어요!" 라는 탄식이 화제가 되고 있다.# 해설자로서 시청자들에 대한 첫 어필은 제대로 통한 듯. 현역시절 본인의 경험과 선수들만의 노하우를 시청자들에게 다이렉트로 전달한다는 점에서 많은 공감대를 얻고 있다.
동년 6월 18일 홍명보호의 첫 경기인 러시아전에서도 괜찮은 해설을 보여주었으며, 특히 이근호의 선제골에 때땡큐 슛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근호에게 소주를 사야겠다는 드립을 날리면서 시청자들에게 깨알같은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 현역 시절의 테리우스는 어디가고 동네축구 하는 형이 등장
6월 20일, D조 조별예선 코스타리카와 이탈리아의 경기를 중계했다. 그리고 스포츠 중계 역사의 신기원인 분노 + 원한의 중계를 하며 이탈리아 대표팀에게 끝없는 디스를 선사했다. # ## ### 특히, 당일 중계중 최고의 명언은 "이 경기 코스타리카가 이기면, 세리에 A에서 코스타리카 선수들을 쓸까요?"(…) 였다. 해당 항목에도 기술되어 있지만 02년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상대로 골든골을 성공시킨 안정환은 몸 담고 있었던 페루자에서 방출된 건 물론이고, 이탈리아 현지의 자기 집에는 들어가지도 못할 만큼 엄청난 원한의 대상이었다. 아내인 이혜원 씨가 이태리 현지의 집에 갔을땐 자동차가 박살나 있었다고(…)
여담으로 잇달아 작두 탄 예언으로 화제가 된 이영표 해설과 비교했을 땐 아무래도 둘 다 현역시절 자신이 담당했던 포지션에 대한 이해도가 더 높고 그래서 해설하는 포인트가 약간 다르다. 다만 기존의 입축구 데이터 위주 해설들과 달리, 실제 뛰어본 선수의 관점에서 짚어주는 부분들은 호평을 사고 있다.
홍명보호가 1무 2패 좋지 않은 성적으로 16강 진출에 실패하면서, 중계석에서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 네티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선제골을 허용한 이후에도 우리 선수들이 자꾸 답답한 플레이를 하자 "아! 왜 자꾸 볼을 돌립니까? 공격을 해야죠!"라면서 거의 폭발 직전까지 갔었다. (...) 여기에 네이버 검색 자동완성으로 '송종국 빡침'이 지원된다(...)
알제리전 이전에 보여주었던 월드컵 스페셜 Again 2002에서 한일월드컵 미국전에서 자신의 동점골을 성공시키고 자기 머리를 격하게 쳐주며 축하해 주었던 것이 K본부 해설위원인 이영표이었음이 12년 만에 밝혀지면서, '그 때 알았으면 바로 법정대응 들어갔죠.^^' 하며 웃음을 선사하기도. 그 때 자막은 더 대박 M본부 K본부 해설위원 12년 만에 법정으로
8. 지도자 생활 ¶
최근 기사에 따르면 파주 축구센터에서 이운재와 같이 A급 지도자 과정을 밟고있는것이 포착되었다. a급 지도자 과정을 거치며 대학팀 감독을 맡을수있는 자격이 주어지고 그 다음과정인 p과정을 거치면 프로팀,국가대표 감독을 맡을수 있다. 조만간 안정환 감독을 볼수있을듯 싶다.
9. 멘탈王 ¶
사커라인 모 유저가 작성한 안정환 고생일대기인데 억울한 또는 부당한 대우와 처사에 관해 대인배나 다름없는 안정환의 멘탈을 보여주었다. 이쯤되면 안정환의 슬픈 선수생활은 운명이라해도 믿게될 정도. 멘탈로 인해 언론의 집중포화를 받는 후배 축구선수들에게 두고두고 귀감이 될 그의 일대기.
- 1999년 부산대우와 계약조건에 명시된 (리그 MVP 먹으면 유럽진출을 위해 전적으로 돕는다는 조항) 약속된 조항이 현대산업개발로 넘어가면서 라리가 진출을 (레알 라싱) 막고, 팬들과 언론에서도 현대산업개발을 크게 비난했지만, 잠을 못자서 이틀 정도 휴가를 냈을뿐, 다시 훈련장에 복귀, 꾹 참고 한 시즌을 더 뛰었다.
- 페루자가 2001/2002 두번째 시즌에 주급을 제대로 주지 않았는데도 (6개월치 3억4천넘게 밀림) 아무 내색도 안하다가 월드컵끝나고 국제소송때 가서 밝혀졌다.
- 국제소송크리 맞고 안종복 & 현대산업개발에 처절하게 배신당하고 혼자 모든 죄를 다 뒤집어쓰고, 안종복의 몹쓸짓으로 인한 FIFA의 판결로 안정환은 2002년 7월 21일자로 개인 빚만 35억이라는 빚더미에 올랐는데, 1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어느 인터뷰에서도 당시 현대산업개발 수뇌부들이나 안종복에 대한 언급을 일체 안하고 자제하고 있다.(이건 일반인이였음 살인사건 안난게 다행... 아버지가 없던 안정환에게 아버지와 다름없었던 안종복이엿기에 그냥 조용히 넘어간 듯... 사실 따지고보면 안정환의 포텐을 망친 핵심인물은 다름아닌 안종복임..)[34]
- 블랙번 못가고 35억 빚진상태로 일본 연예기획사(PM)에 팔려가 3년 동안 착실하게 조용히 노예생활. 경기없는 날에는 회사로 출근해서 연예인 스케줄 이행함. 그런데도 일본에서 97경기 50골이나 넣고, 요코하마 마리노스를 우승까지 시킴.
- 나고야에서 연봉 29억 제의 뿌리치고, 30살이 넘어서 연봉 8억원에 허접구단 메츠로 유럽에 복귀. 우디네세 코스미 감독의 러브콜에도 우디네세 & 리보르노와 협상차 이탈리아에 가있을 때, 직접 국경을 넘어 8시간 운전해온 메츠 구단주의 정성에 감동먹고 메츠로 따라감.
- 프랑스 리그 시절 당시 에이전트에 2억원대 사기를 당하고도, 6개월을 참고 살다가 독일 월드컵이 끝날때까지 내색하지 않았다. 결국 참고 참다가 월드컵이 끝나고 나서 국내로 돌아가 조용히 소송을 제기했다.
- 수원 시절 북패일당에게 모욕을 당했지만 정작 본인은 욕도 안하고, 관중석에 올라갔다는 이유로 천만원 벌금을 냄... 오히려 안정환이 사건 당일날 북패에 사과문을 게시. (일명 권오크 사건... 욕 한마디도 안했는데 언론에서는 삐~~~처리하면서 욕한거처럼 포장)(사건의 개요를 담은 글)
- 다롄에서 중국생활 내내 축구선수 이상의 멘탈을 보여주었다. 연봉의 일부를 고아 및 어린이 병원에 기부하고, 매달 한번씩 찾아가서 봉사도 했다. 그것도 팀에서 한 게 아닌 혼자 자발적으로... 심지어 구단 용품을 가지고 가서 아이들한테 공짜로 뿌리기도 했는데 비용은 안정환 자신의 사비로.... (자기 옛날 생각난다고 직접가서 봉사...)
- 그 어느 선수보다 불우했던 최악의 환경에서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오히려 더 올바르게 큼...
- 은퇴이후 K-리그 홍보대사 지원금은 0원. 모든것을 개인사비와 개인운전으로 전국 방방곳곳을 누비고 상주에 갔을때는 상주스탭 및 팬분들과 저녁 늦게까지 막걸리 파티를 하고 상주시내 모텔 일반실에서 하루 묵고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 홍보대사 이후에도 이젠 조용히 남모르게 내셔널리그 홍보를 위해 3부리그까지 섭렵하며 묵묵히 축구팬들을 위해 직접 운전해서 지방 이곳저곳으로 다닌다고.
10. 이모저모 ¶
한국의 대표적인 '저니맨'으로 꼽힌다. 축구 실력은 뛰어나서 더 높고 화려한 무대에서 뛸 수 있었지만, 아쉽게도 본인의 부적절했던 선택 한 방이 발목을 잡았던 비운의 선수다.
유럽 진출이 성공적이지 못했던 이유가 선수 본인의 플레이스타일 때문이라고도 하고, 그의 성격이 내성적이라 적응력이 좋지 못했던 것이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블랙번에 이적하려고 무리수를 두다가 계약 문제로 고소미를 먹고 패소하여 빚더미에 올라앉았기 때문이다. 일본 생활이 끝난 이후 바로 말도 안 되는 유럽리그 하위권팀에라도 문을 두드리고, 그것마저도 실패하여 무적으로 남았을 정도로 유럽에 미련이 큰 선수가 뭣하러 일본에 오래 머물렀을까? 진짜 다른 거 없고 이 문제 때문에 빚 갚을 돈 벌려고 일본 소속사에 묶여있었기 때문이다. 2013년 본인도 후회한단 인터뷰를 하였다.
안정환은 큰 경기에 강하다는 장점이 있다. 세계적인 선수 중에도 소속 클럽에서 괴물 같은 스탯을 찍어도 막상 대표팀에서 뛸 땐 그만한 위용을 보여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안정환은 대표팀에서 매번은 아니더라도 결정적인 순간에서 골을 넣어준 '영웅 본능'이 있었다.
물론 안정환이 이동국이나 현역 시절 황선홍처럼 매경기 골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 골잡이 스타일은 아니었다.[35] 그러나 승패의 갈림길이 닥쳤을 때 결정적인 플레이로 경기 분위기를 반전시킬[36] 크래커 기질을 가진 선수였다. 때문에 대표팀에서는 본연의 포지션보다 조커로서 더 강렬히 빛을 냈다는 묘한 결과를 남기기도 했다.
별명은 로얄즈시절부터 잘생긴 외모로 붙은 테리우스, 페루자 시절에 이름을 따서 붙은 안느, 2002년 월드컵 때 반지키스 세레모니로 붙은 반지의 제왕이 있고 다롄 스더 시절에 생긴 다롄의 왕(大聯的王)이라는 별명도 있다.
잘생긴 외모 덕분에 1999년 뮤직비디오에 출연한 적도 있다. 야다의 <이미 슬픈 사랑> 뮤직비디오에 나온다.
황선홍[37] 이후 국가대표 주전 공격수들의 숙명이었던 폭풍까임에서 그나마 열외가 되었던 유일한 선수이다. 여기에는 중요한 경기에서 곧잘 활약해준데다가 가장 욕먹기 쉬운 저따위 팀 상대로 골도 못 넣냐는 소리 듣기 딱 좋은 약체팀과의 경기에 상대적으로 적게 출장한 편도 한몫했다. 13년이라는 축구 인생과 그 동안 대표팀에서의 위상을 생각해보면 70경기라는 A매치 출전 횟수는 그다지 많은 출장 횟수라고 보기 어렵다. 당장 박지성과 이영표가 비슷한 시기에 뛰었지만 둘 다 100경기 넘게 출전했고, 이래저래 많은 잡음으로 인해 2000년에 국가대표에 데뷔했지만 2008년 이후 국대에 전혀 뽑히지 못한 이천수가 79경기다. 리그 경기로 욕할려고 해도 팀이 워낙 막장이라 욕을 못하거나(페루자(사실 이쪽은 팀 전력보다 구단주가 문제된 케이스), 메츠, 뒤스부르크), 중계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중국, 일본무대에서 활동하다 보니...
트로이카의 한 축이었던 이동국과는 묘하게 대칭되는 선수생활을 했다. 국대에서 누구보다 빛났지만 그로 인해 클럽 커리어 자체가 완전히 꼬여 버린 안정환, 반대로 클럽을 넘어 리그를(해외 진출은 넘어가자...) 발 밑에 뒀지만 이상하게 국대만 오면 꼬여버리는 이동국. 히딩크는 자서전에서 이동국을 수비가담과 압박, 개인 해결능력이 아쉬워서 제외했다고 언급한 반면에 안정환을 무려 호마리우나 반 호이동크에 견주며 그를 극찬하였다. 물론, 그러기까지 엄청난 자존심 싸움과 조련이 있긴 했지만.
2002년 월드컵 당시 평가전에서 발목 부상을 당해서 주사를 맞으면서 뛰었다고 한다. 경기를 뛰고 싶어서 그 사실을 숨겼다고 한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직전에 박주호와 잠시 대담을 나누기도 했다. 박주호 나이를 물어보고 생각보다 많구나...라며 놀렸고, 군문제로 고심중인 박주호에게 자기도 군대 갔다 왔다고 겁낼 필요 없다고 했다. 그리고 4주 기초훈련만 받았다며 자랑하듯이 놀렸다. 이때 박주호의 표정은 참으로 난감하고 복잡했지만... 뭐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 따서 면제되었으니 안정환이 놀린 것도 나름 추억거리가 될 듯 하다.
무지막지한 외모로 전성기시절에 현빈 김재원 한고은등 수많은 인기스타들과 cf를 연달아 찍었지만 오히려 연예인들을 얼굴로 발라버리는 위엄을 보여주었다. 의류,화장품,향수,스포츠용품등등 안찍어본 cf가 없었다.
고스트 바둑왕의 최종보스로 등장하는 고영하의 외모모델이다. 작가가 한국의 축구선수중에서 따왔다고 하는데 2002년 월드컵당시 장발의 미남축구스타는 안정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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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2년땐 황선홍을 제외하면 마땅한 원톱이 없어서 원톱의 위치에 서긴 했지만 수행했던 롤은 섀도 스트라이커였고, 포스트 플레이는 좌측 윙포워드였던 설기현이 중앙으로 올라와서 대신했다.
- [2] 아내 이혜원, 딸 안리원, 아들 안리환
- [3] 2002년 월드컵, 2004년 아시안컵, 시미즈, 요코하마, 메츠, 뒤스부르크, 다롄
- [4] 8번(부산, 페루자) / 9번(2006년, 2010년 월드컵) / 10번(페루자, 수원) / 26번(시미즈) / 30번 (다롄) / 36번 (요코하마)
- [5] 물론 은퇴한 2000년대 레전드에 대한 적절한 립 서비스가 섞였음을 감안해야 한다. 논란이 있는 설명이긴 하지만 축구협회 설립(1933) 8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도 한국축구가 배출한 최고의 천재는 여전히 최순호라는 주장도 있다.
- [6] 주 발이 오른발이라 페널티 킥은 오른발로 차지만, 코너킥이나 프리킥을 오른쪽 측면에서 찰 때는 왼발로 찬다.
- [7] 안정환이 몸싸움을 싫어해서 드리블 연습을 엄청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안느턴(종이접기)이 잘 될 때는 정말 화려하긴 했다. 가장 환상적인 종이접기는 부산 시절 전남과의 경기에서 박스 안 각도도 나쁘고 수비수도 많은 좁은 지역에서 내줘야죠, 하는 해설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미친 듯 종이를 접어 대다 기록한 골일 것이다.
- [8] 많이 시도 하는 경우에는 종이접기라고 까이기도 했다.
- [9] 물론 손에 반지를 착용하고 축구를 하지는 않는다. 부상을 우려하여 장신구 착용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 [10] 두 차례 한일전 결승골, 월드컵에서 동점골과 역전골.
- [11] 일례로 2006년 독일 월드컵 프랑스 전 때 원사이드 게임이었던 경기가 안정환이 들어오고 나서부터 어느정도 대등한 경기로 바뀌었다.
- [12] 수비수에 약간 맞고 들어가긴 했지만 전체적 코스에 그다지 영향을 주진 못했고 안 맞았어도 아마 들어갔을 확률이 높았다.
- [13] 정말 짤막하게 설명하면 도박중독자에 안정환에 민폐만 끼치는 개막장이었다.
- [14] 안정환 본인이 돈을 벌기 시작했을 때부터는 절대 식사를 거르지 않는다고 한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때 같이 해설을 했던 김성주는 '안정환이 밥을 굶으면 신경이 날카로워진다'고 했는데, 안정환 왈, '어릴 때 하도 굶었기 때문에 이제 굶는 건 지긋지긋하며, 돈 벌었으면 먹는 데 써야 한다'라고.
- [15] 고등학교 진학 에피소드도 의리의 상남자임을 알 수 있는데, 상위랭크의 명문고에서 스카웃하기로 했는데 안정환이 뽑혔다.하지만 같이 동거동락한 친구들과 같이 하기위해 스스로 명문고 스카웃을 포기했다고 한다.
- [16] 다만 미담으로만 포장될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축구든 야구든 팀 종목에서 고교나 대학 진학 때 이렇게 S급 선수에 끼워팔기 식으로 다른 선수들도 진학시키는 건 대단히 흔한 일이다. 그리고 끼워서 진학하는 선수들은 대부분 부모가 힘이 있거나 감독에게 연줄을 댄 선수들이다. 안정환 본인의 의지대로 했다곤 하지만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인 학원 스포츠계에서 감독의 명령과 학부형들의 입김을 무시할 수 있을까? 한 마디로 재능은 있지만 빽은 없는 안정환이 떠밀려서 자기 커리어를 희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 [17] 한 번은 축구부원 수 대로 지급받은 빵과 우유가 하나 비자 선배 한 명이 안정환을 세 시간 동안이나 구타했다고 한다. 그러나 늦게 들어온 다른 선배가 '그거 내가 먹고 나갔는데' 한 마디에 화가 나서 그 길로 합숙소를 도망쳤다고...
- [18] 승승장구에서 본인이 밝힌 바에 의하면 그냥 미용실에 갈 시간이 없어서 머리를 길렀던 거라고 한다.
- [19] 과연 지쳐서 구토하게 만들었는지는 의문을 제기할 만하다. 왜냐면 몬테로가 구토했던 게 후반전 킥오프하려고 대열 갖춰서 서 있는데 느닷없이 토했기 때문이다. 그냥 전날 술이라도 마셨던 게 아니었을까...
- [20] 첨엔 이방인취급을 하며 왕따를 당한 안정환이었지만 그들과 함께하기 위해 파스타, 치즈로 허기를 때우고 명품도 걸치고 (자금사정때문에 아울렛 이월상품도 걸치고)스포츠카도 사면서 그들의 호감을 얻어 같이 술도먹고 밀라노클럽도 같이 가고 했다고 한다. 그 밀라노 클럽에는 유럽의 스타선수들이 즐비했다고. 거기서 본 여자가 수퍼모델 나오미 캠벨이었다고 한다.
나도 가고싶네...그 뒤 마테라치의 이유없는 시비에 같이 맞서서 도와주었다고 한다. - [21] 다만, 이후 마테라치가 인터밀란으로 이적했을때 안정환을 추천하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방송에서 했지만 잘렸다는 카더라도 있다. 당시 방청객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댓글##
- [22] 정확하게는 PM이란 연예기획사에서 소유권을 구입해서 시미즈에 임대 형식으로 보낸 것. 이적 후 빚이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외향적인 성격이 아님에도 PM과의 계약 때문에 일본 쇼프로에도 자주 출연했다. 물론 빚을 다 갚고는 안 나갔지만.
- [23] 일명 권오크 사건으로 알려져 있으며, 모친과 부인, 특히 부인에 대한 성적인 모욕이었다. 부인에 대한 성적인 모욕은 네티즌에 지목당한 여자 서포터가 아니라 술먹고 깽판치던 아저씨들이 했다는 소문도 있지만, tvn에서 방영하는 용감한 기자들이라는 프로에서 해당 상황의 녹화가 방송된 적이 있는데 명확하게 여자 목소리다.(하지만 욕설 부분은 삐 처리되어서 들을 수 없다.) 참고로, 이 때 부인과 가족들이 관전을 하고 있었다!
- [24] 사과를 하긴 했는데 대상이 안정환이 아니었다.
- [25] 부인과 연애하던 시절에도 안정환이 좀 더 데이트를 하고 싶어 훈련을 무단이탈하고 벌금징계를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 [26] 이후로도 부산은 쪼들리는 형편 탓에 쓸만한 선수는 계속 팔아치우고 풋사과만 끌어모아 어렵사리 선수단을 구성했다.
- [27] 페루쟈 임대 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에선 일개용병에 불과했으며 골을 못넣는다고 감독에게 질책까지 들어야했다. K리그 복귀 후에는 연봉만 많이 먹는 폼이 떨어진 노땅에 불과했다. 근 10년 마음고생 하다가 팀의 에이스로 대접을 받는 것이니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 [28] 트레콰르티스타라는 말이 거의 쉐도우 스트라이커 수준으로 공격에 치중하는 공격형 미드필더를 뜻한다. 국대에선 원톱으로 주로 나왔지만 리그에서의 안정환은 주로 트레콰르티스타였다.
- [29] 강하고 낮게 잘 차긴 했지만 이 당시 부폰이 잘 막았을 뿐이였다.
- [30] 안정환에게 패스가 갈 때 이천수가 오프사이드 위치에 있어서 오프사이드로 판정됐었다. 허나 이 당시 이천수의 포지셔닝은 안정환이 패스를 받는데 전혀 관련이 없었으며, 현재 개정된 오프사이드 기준으로는 문제가 없다.
- [31] 1996년 당시에는 너무 어렸고, 2000년에는 페루자에 갓 이적한 후 경기에 자주 나오지 못해서 뽑히지 않았다. 2007년는 수원에서 그야말로 최악의 시즌을 보냈던 시절이라 베어백 감독의 고려대상이 아니였고, 2011년에는 은퇴 직전이라 이미 국대와는 멀어진 뒤였다.
- [32] 허정무 감독에 의하면 이 당시 안정환은 교체로 들어가도 한 15분 정도만 뛸수 있다고 했을 정도였다.
- [33] 사이드에서 안으로 꺾어들어오다 중거리 슈팅
- [34] 상술된 각주에 있듯이 안정환 책임이라고 여길 만한 부분이 없는 건 아니다. 물론 안종복을 비롯한 관계자들은 분명히 비정한 행동거지를 보였지만, 안정환에게 고의라고 판단되는 귀책사항이 없었다면 저 엄청난 빚더미를 개인에게 뒤집어씌운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안정환은 당시 안종복을 비롯한 다른 계약 관계자들의 의사를 전적으로 무시한 부분이 있으므로 일방적 배신이라기보단, 사회에 어둡고 순진한 젊은 축구선수들이 저지르기 쉬운 뼈저린 실책이라고 보는 편이 맞다. 이 사건이 조용히 넘어가게 된 것은 안종복이 안정환에게 아버지처럼 여겨지는 부분도 있겠지만, 안정환 본인이 그 자신의 꿈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꼬임-필시 소송에 갈 경우 어찌어찌하면 문제 없다는 얘기가 있지 않았겠나, 싶다, 흔히 그러듯-에 홀려 계약을 어긴 것도 사실이다. 안종복은 물론이고, 안정환 본인 역시 본인의 포텐을 망치는데 크게 일조했다.
- [35] 애초에 주 포지션이 공격형 미드필더이다.
- [36] 미국전 동점골, 이탈리아전 역전골, 토고전 역전골을 떠올려보자.
- [37] 단군이래 김일성 다음으로 욕을 많이 먹었다는 말이 있다.(...)
- [38] 이 시기에 평가전을 한다고 훈련소에서 구르고 있던 안정환을 국가대표로 차출하기도 했다. 물론 경기에 뛸만한 컨디션은 아니었기에 벤치만 지켰지만, 안정환 본인으로는 '꿀빨았네ㅋㅋ' 라고 할만하다. 남들 2년 군생활 하는 거 4주 단축하는데, 그 와중에 휴가(...)까지 받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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